◆ 르네상스란 무엇이고, 왜 휴머니즘/휴머니스트인가?
흔히 ‘문예부흥’이라고 일컬어지는 ‘르네상스Renaissance’는 어원상 ‘부활’이나 ‘재생’을 뜻하는데,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개념이다. 첫째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15세기 이후 알프스 이북의 유럽으로 확산된 일련의 문화적 변동을 지칭하고, 둘째는 정치·경제·종교·사회 등 당시 유럽의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이 문화적 변동이 사회의 지배적 조류로 작용한 역사상의 특정 시대를 가리킨다.
르네상스 연구자인 한국교원대 역사학과 임병철 교수는 이번 신간에서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예술가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말과 글을 통해 고대 세계를 부활시키려 한 지적 운동’인 르네상스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어 르네상스사를 가장 올곧게 전달하기 위해 지성인들의 열전 형식을 따랐다. 단테, 마키아벨리, 보카치오, 페트라르카처럼 널리 알려진 인물은 물론 일반인에게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브루니, 카스틸리오네, 브란돌리니, 귀차르디니 등을 망라해 당시의 시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직조해냈다. 그러면서 임 교수는 ‘humanism’과 ‘humanist’를 ‘인문주의’(또는 인본주의)와 ‘인문주의자’라는 번역어로 옮기지 않고 ‘휴머니즘’과 ‘휴머니스트’라고 쓴 이유를 「머리말」에서 이렇게 밝힌다.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즘은 오늘날의 인문주의라는 의미보다는 ‘고전을 고전 그대로 읽고 고전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지적 태도’라는 뜻에 더 가까웠다. (중략) 따라서 휴머니즘에 경도된 당대의 지식인들은 오늘날의 인문주의자라기보다 오히려 라틴 고전주의자에 더 가깝다.
19세기 이후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박애 등의 의미를 담게 되는 인본주의나 박애주의 같은 보편적인 개념 역시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본질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나는 인문주의와 인문주의자라는 번역어가 의도치 않은 시대착오적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르네상스기의 성격을 곡해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고전에 기초한 르네상스기의 지적 풍토를 휴머니즘으로, 그리고 그것을 강조하고 실천한 지식인을 휴머니스트로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 다채로운 천재들이 수놓은 백가쟁명의 지적 쟁투기
오늘날 우리는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과 그들이 남긴 다양한 작품을 통해 르네상스를 바라보고 이해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종이 전쟁’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시에는 뛰어난 예술가들에 버금갈 만큼의 탁월한 지성을 갖춘 지식인들이 르네상스기를 명멸하며 풍부한 지적 향연을 벌였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인물 대부분이 항상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때론 숭고한 사상가였으나, 어떤 경우에는 논쟁적인 독설가였으며, 간혹은 성마른 싸움꾼이기도 했다. 스스로 자기모순적인 이야기를 이곳저곳에서 늘어놓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가 르네상스에서 모순적이고 복잡다기한 사고실험의 흔적들을 종종 목격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저자는 바로 이런 점에서 긴장과 갈등 혹은 모순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는 이 통일되지 못한 사고의 혼란이야말로 르네상스를 가장 르네상스답게 만드는 문화적 징후라고 진단한다. ‘르네상스의 아버지’ 페트라르카부터 16세기 교양인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당대 ‘최고의 궁정인’ 카스틸리오네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는 절실하게 새로운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 ‘호모 나란스homo narrans’(이야기하는 인간)의 폭발적인 재등장
그들은 왜 모두 중세 문화를 배격하고 르네상스라는 문화운동에 뛰어든 것일까? 도덕적 타락과 학문의 퇴조로 자기 시대를 암울하게 바라본 그들은 그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역설적이게도 고대인들의 세계로 시선을 돌렸고, 고전고대의 세계관이 시대의 폐해를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한데 묶고 있던 관심사는 고전의 부활만이 아니었다. 튀르크의 위협이 낳은 위기감과 그에 조응하는 십자군 정신 또한 그들 대부분의 삶과 사고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특히 1453년에 일어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그들을 끝없는 불안의 나락에 빠뜨린 일대 충격이었다. 이내 유럽 세계 곳곳에 세기말적인 암울한 분위기가 드리워졌고, 그 위기감이 가장 강하게 감지된 곳이 바로 교회였다. 한편 ‘꽃의 도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본향이라는 명성이 무색하리만치 볼썽사나운 정치적 파벌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혼란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특히 기존의 전통적인 가문과 새롭게 피렌체 정치계의 실세로 부상하던 메디치 가문 사이의 대립은 물리적·정신적 차원 모두에서 도시 곳곳을 암투의 그림자로 물들였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메디치가는 마치 20세기 초의 마피아처럼 은막의 뒤편에 몸을 숨긴 채 15세기 피렌체 정치극장의 모든 것을 기획한 막후의 연출자였다.
이러한 메디치 가문의 부상과 포조나 스칼라 등 여러 ‘벼락 출세자’들이 생생히 보여주듯이, 15세기의 이탈리아는 능력에 따른 신분의 이동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유동적인 사회였다. 또한 그렇기에 르네상스기는 치열한 경쟁의 시대이자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의도적인 자기포장의 시대였다. 한마디로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는 어느 누구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고 위험한 세계였다. 이 ‘정치적 카오스’의 세계에서는 정치문화와 도덕에 대한 의견 대립뿐 아니라 군주정ㆍ귀족정ㆍ공화정 같은 정치체제에 대한 논쟁, 수사학과 철학의 관계 정립을 둘러싼 끝없는 쟁론 등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들이 저마다 ‘호모 나란스’가 되어 인간의 삶과 공동체에 대한 여러 담론을 봇물 터뜨리듯 쏟아냈다.
◆ ‘리퍼블릭republic’은 ‘공공의 것res publica’
르네상스기의 지식인들은 과학적ㆍ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앎의 문제에 천착하기보다 인간의 삶의 방식 자체를 변화시켜 시민들을 올바른 삶으로 이끌고자 했다. 물적 탐욕으로 가득 차 있어 명예가 아니라 부가 삶의 기준이 되는 피렌체에서는 법적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고 일갈한 브란돌리니, 철학에 무지한 사람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고까지 강변한 피코처럼 인간 존재를 인간답게 개선하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지향점이었다. 그들은 인간과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각자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역사의식의 성장이라는 예기치 못한 변화도 일구어냈다. 살루타티의 공화사상에서 브란돌리니의 공화국 비판, 폰타노의 군주의 위엄에 관한 논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고민과 해결책은 다양한 스펙트럼 위에서 부유했다.
하지만 모두 ‘공동체’의 가치에 주목했다는 점에서는 그들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리퍼블릭’은 ‘공공의 것’이라는 생각을 모두 공유했기 때문이다. 극소수 특권층에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었을 때 나타나는 온갖 문제로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는 요즘 세태에 ‘다채롭다’, ‘매력적이다’라는 수식어만으로는 부족한 르네상스기에 우리가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저자의 말이 조용하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르네상스의 지성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과거라는 낯선 세계를 즐거움의 차원에서 맛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간과 사회, 역사와 학문에 대한 르네상스기의 현란한 논의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정치와 권력, 사상의 문제와도 분명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물질만능의 전문가 바보만을 양산하면서도 애써 그 부끄러움을 피하기만 하고, 마치 유행어처럼 문명의 위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인간으로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애써 말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