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하는 소설 이야기
전정희의 소설적 이야기는 정확한 사실주의의 발걸음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이 이야기의 전개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강은하라는 중심인물을 상정하고 있으나 강은하를 통해 발화하지는 않는다. 강은하는 서울에서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중년 여성이다. 결혼 전에는 잡지사 기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여행 잡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신실한 남편과 세 딸이 있는, 굴곡 없는 일상의 주인공이다. 그 강은하가 어느 날 한 장의 통지서를 받는다. 가족들이 살던 강원도 동해시 옛집의 집터에 골프장이 들어서게 되어, 그 땅의 처분에 관한 가족 동의서 건이었다. 이 통지서 수령을 계기로 강은하는 가족사에 얽힌 과거를 소환하고, 또 현장을 보기 위해 고향을 방문한다.
강은하의 가족은 2남 3녀로 한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아버지 강석주는 말년에 교육에 뜻을 두고 학교를 설립했으나, 큰아들 강석훈과 황복자 부부의 농간으로 땅과 재산을 다 빼앗기고 억울한 죽음을 맞는다. 강석훈이 그와 같은 패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그 아내 황복자로 인해서다. 이들 부부는 가족의 재산을 다 가로채고 또 가족을 무시하고 핍박하는 악덕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는 자신들의 패망이다. 여기서 작가가 굳이 단정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으나,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라는 옛말을 떠올리게 한다. 하늘의 그물은 넓어서 성기기는 하나 새지 않는다는 뜻이다. 동시에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더욱 적합한 말도 있다.
이 소설에서 그나마 쾌청하게 맑은 지점, 강은하가 그 남편과 만나는 대목이다. 그 이외의 장면들은 거의 무겁고 어둡다. 왜 이 작가는 이렇게 파란만장한 가족사의 전말을 소설적 담화로 구성한 것일까. 그리고 이 소설을 형성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작가의 직접 또는 간접적 체험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하면 이 소설의 서사에 작가 자신의 체험이나 가족사가 얼마나 개재(介在)되어 있는가가 독자의 궁금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소설의 얼개나 사건의 흐름과 직접적으로 연동하지 않는 것이 이 문학 장르의 본질이다. 작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발설하지 않고, 일정한 문학적 여과나 카타르시스를 거친다. 전정희의 소설을 읽는 우리가 그 현실의 저변을 짐작할 뿐, 직접적인 소설 세계의 해명과 연계하지 않는 이유다. 보다 분명한 논점은 그러한 추론적 환경을 어떻게 소설 가운데 설득력 있게 설정하느냐에 있고, 그것이 또한 작가의 기량을 말하는 방편이기도 한 터이다.
소설속 등장인물의 캐릭터
『가시나무 꽃이 필 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모두 처음의 캐릭터가 끝까지 그대로 유지되는 평면적 인물(Flat Character)이다. 이는 이 소설이 매우 극적인 사건 구조나 구성 기법을 도입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인물들이, 객관적 상식의 수준을 지키며 작중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처음과 나중의 성격이 변화하는 입체적 인물(Round Character)이 있다면, 큰아들 강석훈 정도다. 그는 원래 괜찮은 아들이었다가 아내 황복자를 만나면서 행악자로 변하고, 나중에 모든 것을 잃고 난 다음에 선량한 마음을 회복하는 인물이다. 그의 변화에 부응하여 이 소설은 이해와 화합의 청신호를 내걸게 된다.
이 소설에서 일종의 파격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인물은 큰아들 강석훈의 아내 황복자다. 욕심과 심술이 많은 캐릭터이며, 온갖 악명을 무릅쓰고 빼앗은 재산을 두 아들에게 휘둘려 다 날리고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팜므 파탈(Femme Fatale) 유형이다. 작가의 주변에 실존하는 인물인지, 아니면 상상력에 의해 축조된 인물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소설에서 가장 독창적인 개성을 발양(發揚)하는 인물이다. 다음 예문은 그 악녀 황복자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형편을 보여준다.
제목의 ‘가시나무 꽃’이 가진 유래는 사뭇 의미가 깊다. 다산 정약용의 저술 『흠흠신서』에 가시나무 꽃에 중독된 죽음의 일화가 나오는데, 그 기록이 형화중독(荊花中毒) 곧 가시나무 꽃에 중독되어 사망한 실화라는 것이다. 이 가시나무 꽃은 독성이 있지만 꽃이 피면 그 자체로서 아름답다고 한다. 작가는 이 상징의 의미를 차용하여, 형제들이 서로 독과 가시를 품고 있었다 해도 꽃이 피면 그와 상관없이 아름다움만 기억된다는, 새로운 의미화를 시도했다. 결국 작가의 창작 의도는 형제들이 겪은 그 험난한 기억을 뒤로 하고, 다시 마음을 연 화해와 용서의 미래를 전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거기에 그 많은 곡절을 넘어선 가족애의 힘이 있고, 그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우리에게 전하는 시사점이자 교훈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전정희의 『가시나무 꽃이 필 때』는, 선이 굵은 줄거리에 의지하기보다는 세세한 장면과 구체적인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두는 편이었다. 따라서 이야기의 재미를 따라가기보다, 각기 인물의 내포적 생각과 감정적 동향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 줄지어 있다. 이러한 글쓰기의 경향은 전정희 소설의 성격적 특성을 이루면서, 앞으로도 이 작가가 이와 같은 창작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소설을 생산해 갈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김종회 문학평론가는 해설에서 “ 『묵호댁』에 수록된 단편소설들을 통해 보여준 서사 구성의 능력, 이야기의 확산과 재미의 담보를 가능하게 한 소설적 가능성 등을 염두에 두고 보면, 그는 이미 작가로서의 기반을 이룬 원론적 단련을 거쳤으며 더 큰 성장 발전의 내일을 점치게 한다. 더욱이 『하얀 민들레』 같은 작품을 통해 증명한바, 여성 작가로서의 감수성을 십분 활용한 공감의 세계는, 향후 그의 소설이 더 많은 독자와 만나는 유암(柳暗)하고 화명(花明)한 경계를 열게 할 것”이라고 평한다.
전정희 작가가 앞으로 써내려갈 작품들도 더 치열하고 깊이 있게 소설적 지평을 확장해 나감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좋은 소설을 만나는, 화창한 봄날 같은 기쁨을 누리게 해 주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