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지난 일이야”
“세월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한다고”
모든 것은 집안 불화의 원인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트라우마와도 같은 과거 나의 유년 시절 상처의 기억이 습격해오는 것은.
아버지는 평생 화만 내고 살았다. 폭력까지 휘두르는 아버지와 엄마의 좋지 못한 관계는 고스란히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부부싸움을 하고 난 날에는 뛰쳐나간 엄마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까 밤새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고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엄마나 가족의 관심이 필요했지만 당시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은 텅 비어 있는 듯한 엄마의 빈 껍데기뿐이었다.
그렇다면 왜 『지나가는 밤』은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상처뿐인 유년 시절의 기억을 닥치는 대로 받아들여 단편적인 이야기를 이어붙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조형래 교수가 “현재의 사건이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그 기억은 다시 현재를 새롭게 이해하게 만드는 순환적 구조를 형성한다. 즉 애써 도망치려 했던 유년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현재의 자신을 이해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 바와 같이 내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아버지와 엄마,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서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을 수 있고, 관계는 여전히 불완전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고 나누는 과정에서” “불완전하지만 작은 화해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한 가족의 회복은 부지불식간에 스스로를 ‘습격’한 이와 같은 기억에 의해서다. 불가사리를 건네는 장면은 단절된 관계 속에서도 간헐적으로 부상하는 애정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어둠 속에서 불현듯 번쩍이는 빛과도 같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들은 지속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순간성으로 인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회귀한다.”_「해설」에서
“세월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하는 것처럼 남아 있는 자들의 상처받은 과거는 “다 지난 일”이게 되는 것이다.
치유를 위한 애도
지복의 순간
“어떤 사람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스스로 사랑을 발명해내기도 한다.”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무덤덤했던 나는 평생 울고 싶어했던 사실을 깨달은 순간 유년 시절을 향한 애도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아마도 그 애도는 상처 치유를 위한 감정의 종착점이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또다른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른 뒤 무어라 명명할 수 없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고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너무나도 그리운 그것을” 느끼며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공감하게 된다.
그 바탕에는 상처로 점철되어 있었다고 여긴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에서 불쑥불쑥 밀려드는 애정어린 예외적 순간이 있다. 어린이날 영화를 보여주거나 해변에서 주운 불가사리를 건네주거나 아픈 딸을 위해 짜장면을 시켜주었을 때 등이다. 이러한 애정의 순간은 사랑을 발명하는 순간으로 포착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내 손바닥에 불가사리를 올려놓았다. …… 그 순간 절벽 같던 내 마음속에도 동굴이 생겨났다. 암석처럼 단단한 마음속 어딘가가 약해지면서 서서히 구멍이 뚫린 것이었다. 동굴 안에는 불가사리가 있다. 빛이 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별처럼 생긴 것이 내 안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_ 157쪽
작가가 이야기하는 기억, 서사를 통한 상처 치유는 또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다만 “자신의 한계 내에서, 가능한 만큼의 이해와 용서를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작가가 그리는 행복의 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