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민하고 부지런한 소년, 생계를 위해 물레 앞에 앉다
조사이어는 1730년 잉글랜드 중부 스태포드셔주 버슬렘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도공 토머스 웨지우드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영리하고 손재주가 좋았던 조사이어는 일곱 살이 되자 이웃 동네에 있는 학교에 들어갔다. 읽기와 쓰기, 기초 셈법을 익히고 들판을 뛰어다니며 온갖 동식물을 관찰하는 재미에 빠져 살던 아홉 살 여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간신히 모국어를 읽고 쓰는 수준. 그의 공교육은 여기서 멈췄다. 손이 야물던 아이는 큰형이 물려받은 도기 공장에 들어가 그릇을 빚기 시작했다. 그러던 1741년 마을에 천연두가 돌았다. 다른 형제들은 큰 후유증 없이 역병을 이겨냈지만 가장 어린 조사이어에게는 치명타였다. 몇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다 깨어난 그는 오른쪽 다리를 쓸 수 없는 영구장애를 안고 말았다. 한때 웨지우드 자녀들의 가정교사로도 일했던 에든버러대학교 자연철학 교수 존 레슬리는 훗날 영국 왕립학회 회원 화학자이자 발명가로 거듭난 조사이어의 학문적 성취를 두고 초년시절의 무학과 병을 앓느라 뜻하지 않게 주어진 시간이 역설적으로 그에게 큰 ‘기회’로 작용했다고 증언했다. 지적 훈련의 결핍을 독서로 만회하려 애썼던 웨지우드의 불안과 열망이 평생토록 공부하고 기록하고 분석하며 새로운 과학 체계를 수립하는 학자로 그를 성장시켰다고 말이다.
18세기의 반도체였던 도자기, 가난한 청년은 그 사업에 삶을 걸었다
형 밑에서 일하며 그때까지 나온 도자 기술의 모든 것을 차근차근 익히고 연마한 조사이어는 성년이 되자 독립했다. 부친이 각 자녀 몫으로 남긴 20파운드 유산이 전 재산이었다. 턱없이 적은 액수지만 그의 기술과 혈기, 인내력이 더해지자 그 돈은 충분한 재원이 되었다. 도자 산업은 18세기의 반도체 산업이나 다름없었다. 이 분야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획을 긋겠다는 포부로 시작한 조사이어는 어떤 기업가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나갔다. 존 플랙스먼과 존 베이컨, 헨리 웨버 같은 당대 최고 예술가를 영입해 제품의 미적 완성도를 가능한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전사인쇄 방식과 동력 선반을 적용해 예술성 높은 상품들을 대량생산하는 데도 성공했다. 세계 최초로 제품 카탈로그를 제작하고, 환불 보증과 무료배송 및 1+1 판매방식을 고안한 것도 웨지우드였다. 예쁘고 고급스러운 데다 가격까지 합당한 그의 그릇들은 유럽과 북미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자 주변 업체들이 너도나도 그의 광물질 조성법과 디자인, 판매방식을 베끼기 시작했다. 웨지우드는 담대했다. 자신의 신기술과 사업에 특허를 내는 대신 후발주자들이 노하우를 배워 고르게 유익을 보도록 도왔다. 궁핍하던 도기 마을에 부의 밀물이 들이닥쳤다. 조악한 후발주자에 머물던 영국은 단숨에 ‘본차이나’의 본거지로 도약했다.
1765년.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에 정찬용 식기 세트 ‘퀸즈웨어The Queen's Ware’를 왕실에 납품하고 ‘왕비 폐하의 도공Potter to Her Majesty’으로 임명되면서 웨지우드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영제국 젊은 사업가로 올라섰다. 정계와 학계, 문화계 인사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하지만 웨지우드는 그런 유명세에 쉽사리 들뜨지 않았다. 공장을 새로 짓고, 전시관 규모를 키우고, 신제품을 개발하느라 분주한 상황에서도 더 먼 미래를 구상했다. 여전히 소규모 제조업에 머물던 영국의 산업 체질을 바꾸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이 물류시스템 정비라고 판단한 그는 도로와 철도망, 대운하를 건설하는 일에 착수했다. 영국상공회의소를 태동시키고, 제임스 와트 같은 과학자들을 지원해 산업혁명의 바퀴가 무리 없이 굴러가도록 이끌었다.
경이롭게 아름다운 한 사람의 생애
그는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출세한 뒤에도 고향 땅을 지키며 지역사회에 학교와 병원을 짓는 일에 앞장섰다. 공장에 사내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건강검진과 복지제도를 정례화해 노동자들의 교양·문화 수준이 고르게 향상되도록 유도했다. 가난한 예술가와 학자들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 나아가 노예제도의 야만성을 설파하며 노예제 폐지 운동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웨지우드의 재정적 지원 아래 조각가 핵우드가 모델링한 저 유명한 메달리언, 쇠사슬에 묶인 채 “저는 사람도, 형제도 아닌가요?”라고 간청하는 흑인 형상 부조(본문 173쪽)가 아니었다면 흑인 노예무역의 야만성을 설파하는 목소리가 그토록 강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을까? 종교 자유를 찾아 영국으로 떠나온 각국 난민들이 안전하게 정착하도록 지원했으며, 미국 독립을 소신 있게 지지했다. 애써 얻은 부와 권위와 명성을 신중하고 사려 깊게 선용해 자신이 사는 현재를 넘어 미래 세대가 좀 더 인간답게 진보하도록 이끈 것이다.
이렇듯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그는 자애로운 부성으로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내 부러움을 샀다. 특히 화학자였던 아들 토머스는 사진 제판의 기초를 놓았으며, 외손주 찰스 다윈과 결혼한 친손녀 엠마 웨지우드 역시 당대를 대표하는 여성 과학자였다. 한마디로 웨지우드는 당대인뿐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믿고 본받을 만한 전인적 삶의 모델이었다. 조사이어 웨지우드의 65년 삶은 들여다볼수록 경이로워서, 그의 전기가 지금껏 단 한 권도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의아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책 『조사이어 웨지우드』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 생을 기이하도록 아름답게 완성한 한 인간을 탐험하는, 낯설고도 충만한 독서 기회를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