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유럽과 (트럼프와 푸틴의) ‘크레이지’ 정치의 등장 그리고 철학의 종언 및 ‘인간의 종언’과 AI의 본격 도래.
그리하여 이제, 다시, 철학의 시간이 도래하고 있다. 어떻게 ‘다른 시작’으로 나아갈 것인가? 왜 예술-물음이 핵심적인가? 미래의 사유와 예술은 과연 가능할까? 어떻게?
20세기 말에는 공산주의가 몰락했지만 21세기에는 그것과 맞짝을 이루며 승리한 ‘자유주의 유럽’ 도 몰락중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모든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한 번은 비극, 다른 한 번은 소극으로 벌어진다고 했는데, 지금의 러우 전쟁은 아무래도 소극처럼 보인다. 그처럼 유럽에서는 유럽 밖에서 일종의 유럽의 내전 격인 ‘정치’ 전쟁이, 미중 간에는 트럼피즘의 생환 이후 ‘무역’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브뤼메르 18일」에서처럼 이처럼 거대한 균열과 공백의 와중에 온갖 ‘에피고넨’이 판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미국 주도의 근대의 자기비판인 ‘포스트-모더니즘’도, 그것의 원조 격인 유럽의 ‘프랑스 사상’도 모두 요령부득이 되었다. 둘은 모두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나 부정에 기반했지만 트럼프와 시진핑과 푸틴 트리오?(‘유럽’은 콰트로를 구성할 수 없을 것이다)로 구성된 ‘신세계’가 구세계 유럽의 거의 모든 사상을 부정하는 듯하다. 게다가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넘어 AI가 전 지구화되면서 인간을 현실적으로 부정, 대체하는 현실은 감히 ‘사유에의 용기’조차 내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저자 허욱이 그와 같은 사유에의 용기를 오늘날 가장 치열하게 보여주고 있음은 그의 최근 행보가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동서양의 형이상학과 ‘기술철학’ 그리고 동양의 전통사상을 종횡무진하면서 경이로운 테크놀로지가 무시로 출몰하는 우리의 ‘사유가 궁핍한 시대’에 다시 철학과 사유가 나아갈 길을 묻고 있다.
본서는 전작인 「재귀성과 우연성」과 후속작인 「기술과 주권」(출간 예정)과 함께 그의 최근의 사유의 모험을 구성하는 3부작 중 하나이다. 저자는 「재귀성과 우연성」에서는 기계론, 유기체, 사이버네틱스 등을 둘러싼 근대 사상사를 새롭게 ‘탈구축’하고 있다. 본서에서는 철학의 오랜 동반자인 예술에서 동일한 작업을 수행한다. 다소 차이가 있다면 본서에서는 동양에서의 예술 논의를 본격적으로 끌어들여, 저 일제시대의 ‘근대의 초극 논쟁’과는 전혀 다른 지평 위에서 ‘서구(형이상학)=근대 극복’문제를 새롭게 구성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기술과 주권」에서는 제목 그대로 헤겔과 슈미트를 중심으로 ‘테크놀로지와 주권’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전 지구적 사유’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살피고 있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앞서와 같은 정치적·사상적 정세 속에서 군계일학을 이룬다. 가령 그의 문제의식은 최근 한국의 일부 지식계의 지지를 얻고 있는 ‘사변적 유물론’의 시좌는 전혀 궤를 달리한다. 특히 홍콩 출신의 ‘동양 지식인’으로서 그가 갖고 있는 서구 근대와 형이상학에 대한 색다른 비판 의식은, 지난 20세기에 있은 한중일 3국의 ‘탈아입구’ 이후, 21세기에 갈 길을 잃고, 다시 가령 ‘중국 특색’으로 귀환 중인 현재의 형국에서 그를 우리의 사상적 좌표로 만들고 있다. 가령 J-컬처를 재구성했다고도 할 수 있는 K-컬처에 대한 ‘철학적 해석’, ‘동양학적 해석’은 좀체 찾아보기 힘들지 않은가? 또 겨우 가난을 벗어난 중국의 ‘천민자본주의’는 좀체 서구에게도 모범이 될 만한 문명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등의 물음도 침묵 속에 부유하고 있다.
■ ‘예술의 종언’이 철학의 부활로 이어지지 않는 사유의 불임 시대! AI의 테크놀로지가 예술을 대체하는 시대, ‘예술가’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가?
그리하여 이제, 다시, 예술을 우회해, 사유의 ‘다른 시작’을 탐색할 시간이 도래하고 있다. 헤겔의 정신의 운동으로서의 예술, 형이상학의 완성으로서의 기술=철학의 종언과 달리 ‘다른 시작’을 모색하게 해주는 하이데거의 예술론 그리고 우주-인간-기술을 서구 형이상학과는 완전히 다른 지평 위에서 펼쳐 보이는 동양의 산수화론. 예술은 철학과는 어떻게 다른 인식 혁명을 보여주는가?
서구의 유명 사상가들에 의해 적어도 세 차례 유명한 ‘예술의 죽음’이 선언된 바 있다. 헤겔과 하이데거와 벤야민이 그들이다. 물론 ‘예술의 죽음’이라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세 사상가가 이해하는 바의 각각의 예술의 의미와 죽음의 소이는, 당연히, 상이하다. 헤겔에서 예술은 ‘(절대)정신’(및 종교)와 짝지어지며, 하이데거에게서 예술은 ‘다른 시작’을 위한 원천의 모색과 관련되며, 벤야민에게서 예술은 기술의 본격 등장과 관련된다. 물론 다 지난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21세기에 조성된 새로운 정치적·예술적·기술적 정세는 그들을 새로운 시좌 속에서 꼼꼼히 재독해해 ‘탈구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서구 형이상학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이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에 죽음에서 생명이 나온 수 없는 자연의 이치가 인간의 사유에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종의 우회로가 필요한데, 형이상학 그리고 인간의 기술과 철학과는 상이한 방식으로 관련을 맺는 예술이 그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1장 ‘세계와 대지’에서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원천」을 21세기의 ‘다른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철저하게 탈구축한다. 그리고 그것에 하이데거의 세잔 및 클레 론을 겹쳐 읽으면서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죽음과 사유의 과제’로 선언만 해놓은 과제를 21세기적으로 수행한다.
저자 논의가 그것으로만 그친다면 다소 서구 중심적이고 여전히 철학자 중심적이라는 아쉬움을 남길 테지만 2부의 ‘산수’론은 그와 같은 우려를 일거에 뒤집는다. 아니 오히려 주역의 궤를 비롯한 동양의 논리를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재귀성’과 연결시키는 그의 천재적 독법은 양자 컴퓨터와 동양의 논리를 연결시키고픈 유혹을 느끼도록 만든다. 가령 디지털의 0과 1은 ‘모순’과 ‘갈등’ 속에서 ‘지양되지만 ’건곤‘ 등의 동양적 이원론은 ’대립적 연속성‘을 이룬다(그것이 ‘현’ 논리이다).
이처럼 우주=세계-기술-인간을 구성하는 ‘형이상학’은 당연히 동양에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서양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그것은 지난 100년의 근대화 동안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시기에는 용도폐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가령 ‘물’과 ‘수’의 경우 근대화 논리에 따르면 곧장 ‘수력’이나 ‘땅값’과 관련될 것이다. 그것들은 예술적 대상이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둘이 대대적으로 자본화되는 것과 달리 동양 전통에서 둘은 비-문명, 그러니까 코스모스 및 예술 그리고 도덕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포스트-유럽 시대에는 유럽에 의해 용도폐기되어온 ‘동양’을 다시 읽는 것이. 그러니까 ‘탈구입아’하는 것이 ‘출구 없음’이라는 표지가 세워진 21세기의 사상적 궁핍을 벗어나는 길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술과 자동화’를 주제로 한 3장에 이르게 된다. 앞의 두 장에서의 논의가 있었기에 이 3장을 통해 대개 ‘기계중심적인’ 일종의 ‘둠스데이’ 같은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주류 담론과 달리 오늘날 우리가 어떤 인식 혁명을 이루고, 동서양을 어떻게 통합적으로 사유해야 하는지를 발본적으로 재사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