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진 채로 완결된 세계
불투명의 바다를 부상하는 허공의 섬
“파도가 시작되는 걸까.
앞으로 얼마나 더 흔들려야 할지.”
2010년 등단 이후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해온 김엄지의 신작 소설 『할도』가 자음과모음 ‘새소설’ 시리즈 열여덟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할도』는 2022년 계간 『자음과모음』을 통해 두 계절 동안 연재되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제목과 동명의 섬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김엄지 특유의 “태연함, 냉소, 괴상함”으로 “소설적 관습에 대해 ‘그딴 거 몰라’ 하고 말하”며 특정 사건이나 서스펜스 없이 흰색과 검은색 사이의 무수한 회색 톤으로서 완성된다.
“미안하지만 할도에 가라. 거기에 가면,”
‘나’는 아버지의 유언으로 할도로 떠난다. 벨 할, 섬 도를 써 할도割島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섬의 이름은 “비가 잦고 빗줄기가 거세 뺨에 맞으면 살갗이 베인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할도에 머무는 동안 ‘나’는 그저 ‘있음’에 충실하다. 아버지는 “할도에 가라”고 했지만, “거기에 가면, 이 말의 끝을 맺지 못했다”.
『할도』에는 ‘나’와 쥬지오의 여주인, A와 B, 나이 든 섬의 의사와 식당 직원 등이 등장하지만, 모두 어떠한 명칭 혹은 지칭으로만 불린다. 김엄지는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넘어 ‘믿을 수 없는 공간’으로 소설의 영역을 확장한다. ‘할도’는 한국, 북유럽, 미국의 외딴섬, 심지어 ‘어떤 평행우주 속 한국의 섬’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인물은 끊임없이 ‘왜 할도에 왔는지’ ‘언제 돌아갈 것인지’ 인물은 반복적으로 질문받는다.
“선생님 여기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마세요. B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요? 내가 되물었다.
선생님을 기다리시는 분이 계실 텐데요. B가 말했다.”(32쪽)
할도를 소개하는 팸플릿에는 단 세 가지가 그려져 있다. ‘해안 절벽’과 이름을 모르는 ‘세 종의 식물’ 그리고 ‘회색빛에 가까운 흐린 푸른색’의 “허공”. 팸플릿의 배경은 허공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할도는 모호한 공간이다. 실재가 어디까지인지, 실재하지 않는 것은 어디서부터인지 독자는 알아차릴 수 없다. 뜨거운 전복죽은 실재 같고, 서쪽 절벽에서 만난 노인은 환상 같다. 컵라면은 실재 같고, 한쪽 귀가 쳐진 섬의 유일한 의사는 환상 같다. 그렇다면 ‘할도’는 실재일까? ‘나’는 팸플릿에 있는 것들이 “할도를 대표하는 전부”라고 말한다. 답은 나왔다. 할도는 반쯤 실재하고, 반쯤 실재하지 않는다.
끝없는 파도, 무한한 세계
모든 것은 연장, 연장, 연장……
사라져가는 것들의 세계에서 조우한
사라진 것이라 믿었던 세계
김엄지는 작가의 말을 통해 ‘할도’가 “신남해변, 송곳산, 태하리의 흔적”(141쪽)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할도’는 동시에, 아버지의 유언으로 할도에 온 ‘나’와 ‘귓속에서 긴 털이 자라’고 ‘꼬리 전체가 쇠사슬’인 괴물 ‘쥬지오’를 믿는 ‘여주인’, ‘자기 아버지를 때린’ ‘A’와 스스로 ‘자기 손가락’을 자른 ‘B’, 섬의 늙은 의사와 전복죽을 파는 식당의 직원이기도, 또한 ‘싸라기눈이 흩날리’는 서쪽 절벽이기도 하다. 무의식은 의식에 발붙이고 있을 때 실현되는 것, 비현실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을 때 드러난다는 이 당연한 진리를, 『할도』는 흰색과 검은색 사이의 무수한 회색 톤으로서 반영한다.
‘새소설’은 지금 한국문학의 가장 참신하고 첨예한
작가들의 시선을 담는 소설 시리즈입니다.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젊고 새로운 작품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