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역사 속 아이들 이야기
삼국통일을 한 신라와 고려, 조선 등 우리나라 역사의 메인을 이루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시기가 짧거나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백제, 가야, 발해 등의 역사는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데 한계가 있다. 변방의 역사 속 이야기를 찾아내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봄볕 역사 동화는 백제에 살았던 아이들의 이야기로 포문을 열었다. 역사 동화와 앤솔러지를 많이 작업하고 있는 정명섭 작가와 김하은, 임지형 작가가 백제 시대를 살았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불러내 엮은 이야기가 《하늘 바다에 뜬 배》이다.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아이들, 재령과 가랑, 산이
기와를 만드는 곳으로 유명한 아시촌 마을에서 온 재령은 차출되어 위례성으로 갈 때 어른들을 따라온 아이이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린 나이에 어른들 틈에 끼어 기와 만드는 일을 배운다. 유리 공방에서 일하는 가랑은 불쏘시개를 할 잔가지나 검불을 주워 오는 일처럼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아이이다. 평소 가랑이라는 이름보다 ‘거시기’로 더 많이 불린다. 하급 무관의 아들 산이는 친구에게 못됐게 구는 아이 앞에서 용기 있게 친구를 위해 싸울 줄 아는 아이이다. ‘백제의 혼’을 지키는 것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구하는 일보다 더 중하다고 여기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남은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앞장서는 당찬 아이이기도 하다.
세 아이는 어느 역사 속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아이들이다.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거나 ‘거시기’로 불리는 아이들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무대 위에 올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백제를 무대로 재령, 가랑, 산이 세 아이는 자신의 삶을 더욱 단단하게 채워 스스로의 존재감을 반짝반짝 빛낸다.
왜 백제 이야기인가?
기원전 18년에 고구려에서 내려온 온조 집안이 지금의 서울 지역인 위례성에 나라를 세운 것이 백제의 시작이었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되기까지 백제는 위로는 황해도, 아래로는 충청 전라 지역 일대로 영토를 넓히며 전성기를 누렸다. 백제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중국의 문물을 잘 받아들였고, 이를 왜와 가야에 전수해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을 이루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만큼 장인들의 예술작품으로 유명한 백제라서 유리 공방, 도자기 공방에서 일하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아주 잘 어울린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정명섭 작가의 단편 〈하늘 바다에 뜬 배〉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삼국사기에서 백제 첫 번째 왕인 온조 시대의 궁궐을 보고 한 표현이라고 한다. 작품 속 기와 장인 승태 박사는 백제 문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했다. 검소함과 사치스럽지 않은 면모는 현재 남아 있는 백제 유물을 봐도 알 수 있다. 세 단편의 소재가 된 백제의 기와, 미륵사 석탑과 사리 장엄구, 정림사 오층석탑 역시 소박하고 사치스럽지 않은 대표적인 백제 유물이다.
기와는 흙과 물만 섞어 만든 것인데, 기와를 모아두면 집의 지붕 역할을 한다. 옛 건물이 불타 없어져도 기와는 남는 경우가 많다. 단순해 보인다고 만들기 쉬운 것은 아니다. 기와 무게가 다르면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 버티지를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 무너지고 만다. 이렇듯 기와는 화려해 보이지는 않아도 ‘기본에 충실함’의 가치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 장엄구는 봉안 당시 모습 그대로 발견되어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고 한다. 백제 금속공예 기술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낸 사리함은 누가 또 어떻게 만들어낸 것일까? 가랑이라는 평범한 아이가 미륵삼존을 보고 그 영광스러운 기운을 담아 사리 장엄구를 만드는 일을 돕는다는 이야기는 잊힌 백제 예술가들의 고민과 열정을 잠시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오랫동안 ‘평제탑’이라고 불렸다. 탑 1층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전쟁에서 이긴 뒤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비문 때문이다. 정림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에서 한때 백제의 사회,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백제 멸망 무렵 산이는 어른들의 싸움 속에서 힘없는 사람들을 먼저 챙기는 따뜻한 아이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역사 속 아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기와 만드는 어른들이 위례성을 지키는 일에 몰려가야 했을 때 재령은 승태 박사의 명을 받아 기와 만드는 도구를 챙겨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다. 한 사람이라도 기와 만드는 기술과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승태 박사의 뜻과 가르침을 지켜려 애쓰는 재령은 아이로서 감당하기 힘든 위기를 겪었으나 자기 역할을 묵묵히 해낸다.
백제 무왕이 639년에 미륵사 석탑을 지으려던 무렵 가랑은 유리 공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아이였다. 가랑은 그날도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서 잔가지를 긁어모으고 있었다. 갑자기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큰 못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다. 가랑은 의도치 않게 빛 속에 나타난 미륵삼존을 보고 말았다. 마침 그 자리에는 백제 무왕과 왕비도 함께 있었다. 왕은 사람들에게 그 자리에다 큰 절을 지으라고 명한다. 여러 공방에서 석탑에 넣을 사리 장엄구를 어떻게 만들어낼지 고민하던 중 미륵삼존을 알현한 가랑이 중요한 역할을 잘 해내면서 가랑은 더 이상 ‘거시기’로 불리지 않게 된다.
부여산은 정치적인 잇속을 챙기는 어른과 복수에 눈이 먼 어른들을 보면서, 한낱 촛불처럼 가냘픈 백성들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는 만고의 진리를 아이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역할을 한다. 망해가는 백제의 모습과 그 속에서 휘둘리는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21세기가 된 현재에도 유효하다. 대륙 저편의 나라에서 전쟁으로 수많은 목숨이 스러져 가고 있는 지금, 산이가 지켜내려고 애쓴 모습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