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움과 분노, 절망과 저항 끝에서 다시 피어오르는 찬란한 날들!
트라우마를 뒤로하고 빛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힘겨운 삶의 여정
“이제 나는 서러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사라진 불꽃 너머 다시 내게 손짓하는 저 흰 연기처럼.”
나무들 사이에 초조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여섯 명의 사내들. 그들은 운전수와 안내인이 이끄는 소형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으려 한다. 그는 낯선 사내들과 버스 뒷좌석 아래 비밀 공간, 섬뜩한 냉기와 어둠뿐인 그곳에 들어가 숨는다. 아침 해가 떠오를 시간,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아올 무렵이면 국경에 도착할 예정이다. 그가 아이였을 때 남자(아버지)는 여자(엄마)를 학대했다. 남자는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여자는 하루 종일 쇠솥을 닦았다. 그가 자라서 소년이 되었을 때 여자는 남자를 떠났고, 남자의 분노는 소년을 향했다. 남자의 폭력에 소년의 얼굴은 핏물로 얼룩졌다. 여자가 저쪽 나라로 떠났다는 풍문에, 소년은 여자가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소년은 청년이 되었고 남자가 집을 비운 사이 도망쳤다. 그리고 지금 개조된 버스 안, 역한 술 냄새가 진동하는 비좁은 공간에서 미래를 꿈꾸고 있다.
남자의 두꺼운 손이 소년의 머리를 치던 날, 소년은 쇠기둥에 이마가 깊게 패었다. 핏물이 눈물처럼 소년의 얼굴로 흘러내렸다. 피를 닦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소년은 남자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여자가 저쪽 나라로 떠났다는 사실을 소년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믿을 수 있었다. 소년은 여자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 「국경」 중에서(p. 17)
열일곱 여자아이에게 운명은 가혹하기만 했다. 아빠는 늘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다. 상이 엎어지고 집 안 가구들이 부서져 나가는 날들 속에서 어느 날 아빠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몇 년 후 아빠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마저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남은 가족은 이제 남동생과 병든 할머니뿐이다. 돈이 필요했다. 소녀는 친구가 회사원 아저씨와 화상 통화를 하던 채팅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렇게 벼랑 끝 세상에서 소녀는 서러움을 삼키며 일탈을 꿈꾼다.
초등학교 6학년 봄, 처음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았을 때도, 중학교 2학년 가을, 정말 작은 배낭 하나만큼의 짐만 챙겨 엄마가 사라졌을 때도, 작년 겨울 계단에서 구른 할머니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던 밤에도 나는 운명을 생각했었다. 그건 마치 내가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사마귀나 뱀 따위의 긴 생명체가 나를 칭칭 감고 조르는 기분이었다. - 「세상 끝, 소녀」 중에서(p. 49)
구겨진 현실에 대한 애정 어린 응시와
존재의 모습을 탐문하는 치열하고 섬세한 서사!
스물여섯. 행복할 줄만 알았던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허니문 베이비가 생기고 임신 휴가 같은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직장에서 출산 직전까지 일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일을 쉴 수는 없었다. 휴가는 일주일뿐이었다. 고단한 날들 속에서도 먼 나라의 파도 소리를 상상하며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저렴한 동남아 패키지여행도 다녀왔지만, 돌파구가 되지 못했다. 아픈 아이를 안고 달려간 병원, 뒤늦게 도착한 남편의 낯선 새 양복에서 처음 맡아보는 향이 배어난다. 이제 나는 무기력하기만 한 삶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우리 앞엔, 너의 이름처럼 찬란한 날들이 펼쳐질 거라고 하면, 아이는 이해할 수 있을까.
어디선가 작은 벌레가 날아와 옷자락에 앉았다. 오래전 보았던 반딧불을 떠올려 본다. 작고 여린 그 빛은, 부신 태양 빛에 가려 숨어 있다. 어둠이 내리면, 그때는 다시 볼 수 있을까.
- 「찬란한 날들」 중에서(p. 103)
아내의 폐가 좋지 않다는 진단을 받고 잠시 도시를 떠나 산 주변 공기가 맑은 곳으로 한 달 살기를 떠났건만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웃집 마당에는 얼굴에 멍이 있고 입술이 터진 채로 한 아이가 쭈그려 앉아 있다. 아내는 오히려 그곳에서 어릴 적 암흑 같던 기억을 떠올렸다. 엄마가 일을 나가면 1층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나를 위층으로 끌던 아빠의 손, 어느 날 엄마가 방문을 열고 비명을 지르던 모습, 그리고 내 팔과 다리에 보이던 검은 얼룩들……. 아내는 아이가 계속 신경 쓰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이는 추운 듯 몸을 웅크렸다. 아내는 아이를 가만히 안았다. 아내의 품 안에서 아이는 조용히 흐느꼈다. 오래된 무언가를 내려놓고, 아주 긴 시간 숨긴 채 살아가야할 무언가를 품에 안듯이. 아이를 안은 아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 「아이의 집」 중에서(p. 133)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끝없이 강하고 숨 막히는 사막에 도달하면 쏟아지는 빛 아래서 사랑과 이별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화자는 다른 여자와 그의 이름이 박힌 청첩장을 본 뒤 회사를 그만두고 먼 나라로 떠난다. 다시 살아갈 힘을 찾기 위해.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룸메이트가 된 J, 그녀의 배꼽 언저리엔 ‘타투’가 새겨져 있었고, 그것은 세상에 태어나는 대신 빛으로 사라진 아이의 무덤이라고 했다.
J의 이야기가 아파서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아이를 낳지 않은 거냐고? 그를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J는 빛을 잃어가는 저녁 무렵의 하늘같이 슬픈 목소리로 말합니다. 난 한곳에 정착할 수 없어. 세상의 모든 하늘을 내 눈에 담으려면 떠나야만 했거든. 아이는 내게 그걸 알려주고 떠난 거야. 이젠 그만 떠날 시간이 됐다고 말이야. - 「빛의 고백」 중에서(p. 159~160)
남편의 이별 통보에 세영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환영처럼 어른거리는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고등학생 시절 한동네에 살던 우진에 대한 오랜 기억이다. 10년 만이었다. 우진이 다시 세영의 앞에 잔상을 드러낸 것이. 수능 전날 찾아와 꼭 한번 오토바이를 태워보고 싶다던 우진의 그 애절한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세영은 그 부탁을 저버렸고 그날 밤, 사고가 있었다. 세영은 오랫동안 그날 우진을 만나러 가지 않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성훈을 만나야 한다. 나는 이제 괜찮다고, 나는 이제 너를 사랑할 수 있다고. 나는 이제 네 안에서 다른 누군가를 찾지 않을 거라고. 세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가 두려워했던 건 우진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었다. 다시 누군가를 잃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 「너의 날개는 그날 바람에 스쳐 가듯 흔들리고」 중에서(p. 192)
오십 세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로 돌아가 나를 엄마로 착각하곤 한다. 내가 태어나고 집을 나간 엄마에게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 아버지의 병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집 안에 틀어박혀 식물의 일부가 되겠노라 결심한다. 화분 속에 뿌리를 박은 다른 식물들처럼. 그리고 어느 날 화분 속 흙더미를 파헤치다 문득,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섬뜩한 기분에 휩싸인다.
“이별은 갑작스러운 거야. 그냥 더는 너한테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아. 짜증이 난다고.” […] 현수의 목소리에선 질려버린 무언가를 떨쳐내려는 듯한 단호함이 느껴졌다. 나는 오랫동안 서 있었다. 심장 어딘가의 신경이 뭉텅이로 잘려 나간 기분이었다.
- 「화분」 중에서(p. 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