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배 속도 빌리지 않고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여전히 혼자다”
새로운 가족, 또는 이상한 동물원
‘나’에겐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이라기보다는 혈연관계라는 외피를 두른 “이상한 동물원”에 가깝다. 완전한 성년도 미성년도 아닌 나이, 스무 살. 이제 막 세상 밖으로 첫발을 떼는 나이에 ‘나’는 엄마를 잃은 후 외할아버지를 따라 외갓집으로 왔다. 혼자 남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이곳에서도 나는 여전히 혼자다. 그런데 이 집에서 혼자인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할아버지와 삼촌, 이모로 구성된 외갓집 식구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집 안에서는 서로 떨어지지 못하고 네 식구가 함께할 수밖에 없다. 다락방이 달린 좁다란 방 한 칸에서. 그렇게 오롯이 홀로일 수 없음이, 함께이면서도 온전히 혼자라는 사실이 ‘나’를 더욱 고립시키고 절망케 한다. 유일하게 동질감을 느끼는 존재는 앞방 남자뿐이다. 그도 나처럼 우편물이 오지 않는 타지 사람이라는 것, 어쩌면 나처럼 천애고아 또는 버려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연결고리. 이후 ‘나’는 남자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남자 방의 열쇠를 훔친다.
“기억할 게 많은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는 법이다.”
각자의 방식대로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
공장 폐수로 썩어들어가는 샛강과 일 층에 여섯 가구가 세 들어 사는 목욕탕집, 공동 세면대와 화장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빈 마당. 소설에서는 빈한하고 스산한 풍경이 내내 펼쳐진다. 그 중심에 다락방이라 하기에도 협소한 천장방이 달린 단칸방에서 살아가는 네 식구가 등장한다. 낮에는 은행에서 돈을 세고 밤이면 흉몽에 시달리는 이모. 늑막염 때문에 한 움큼씩 약을 털어 넣는 삼촌. 더는 팔리지 않는 무허가 블록벽돌을 계속 찍어내는 할아버지. 그리고 이들의 밥과 청소, 빨래를 챙기는 ‘나’. 시멘트보다 모래가 더 많이 섞인 할아버지의 벽돌처럼 금세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운 이 혈연집단은 흡사 사막의 모래알로 이뤄진 듯하다. 면으로 보면 하나일지라도 점으로 보면 흩어져 있는. 이들은 서로에 대해 일절 묻거나 답하지 않은 채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시간을 견디고 또 견딘다.
‘나’는 누가 시킨 적이 없는데도 식구들의 도시락을 챙기고 마당에 물을 뿌리고 화단의 잡초를 뽑으면서 하루를 버틴다. 다른 일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일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다. 하루는 생활비 외에 무엇을 건네는 법이 없는 이모가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검정고시 교재를 사다주기도 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의 또 다른 일과는 목적도 계획도 없이 기차역에 나가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는 하루에 두 번 서울로 가는 기차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모와 삼촌도 기차역으로 나간다는 걸. 집을 떠나지도 못하면서 하염없이 기차역을 서성이는 그들은 모두 한 식구처럼 닮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혼자 아파하는
세상의 모든 ‘이경’에게 건네는
조경란의 ‘움직임’
김미현 평론가는 작품 해설에서 “행복은 열성이고 불행은 우성”이라면서, 불행이 혈액형처럼 피를 통해 유전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 ‘피’는 바로 가족이라는 혈연집단이며, 가난과 질병, 소외와 고독으로 점철된 소설 속 가족들의 고통과 상처는 할아버지에서 삼촌과 이모로, 그리고 ‘나’로 대물림되어 전해진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고통과 상처가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큼 서로 무척 닮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완류로만 흐르는 시간”도 기어이 흐르고, 미동조차 없어 보이는 네 식구의 삶에도 변화는 찾아든다.
빛은 어둠이 있을 때라야 가장 밝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짙은 어둠 속에서도 어떻게 한 줄기 빛이 스며들어 가는지를 특유의 정밀하고도 차분한 시선으로 그려 보인다. 가족이라는 모래성 안에서 ‘나’는 집을 떠나지 않고 남아 움직여나간다. 흙을 보듬어 단단하게 다져나갈 힘을 조금씩 ‘연습’해가는 것이다. 이처럼 가족의 의미와 본질을 묻는 이 소설은 가족을 거부하고 해체하지 않더라도 가족 그 자체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사람이 찾아들고, 또 떠나간 이들의 자리는 그것대로 남겨둔 채 점차 형태를 갖추어가는 가족의 모습으로. 폭우에 살아남아 스스로 몽우리를 틔우는 꽃씨와도 같이, 삶의 공허 속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애틋한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