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국내는 물론 국외로 나아가 오지를 찾아다니며 자전거 타기 삼매경을 즐기는 필자가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라‘라는 어명을 받아 일생일대 회한을 안고 지나가야 했던 1,700리(680km)에 이르는 그 멀고 험난한 여정을 자전거로 순례에 나선 13일의 그 치열한 현장의 자기 성찰 기록이다.
’백의종군로‘는 이순신 장군이 정유년(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처분을 받고 서울의 의금부 옥문을 나와 경상남도 초계에 있는 도원수부까지 걸은 머나먼 길이다. 2015년에 그 옛길이 고증을 기초로 복원되었고, 2017년에 한국체육진흥회에서 서울 을지로의 이순신 생가터부터 최종 도착지인 합천 초계까지 주요 지점에 55개의 스탬프를 설치해 백의종군로 도보 길을 조성했다.
하지만 자전거 타기 마니아인 필자에게는 그 길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었던데다가 복원되었다지만 길은 뚜렷하지 않고 희미하고 아득히 멀었던 그 길을 자전거 타기로 도전한다는 게 고난도 목표였다. 한쪽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그 길이 어느 날 서점에서 백의종군로 도보 여행기 책자를 접하는 순간 ‘이젠 도전해야겠구나!’라는 확신으로 다가왔다. 그다음 단계로 장군이 쓴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도전의 열망이 다시 타올랐다.
도보로 25일이나 걸리는 시간을 줄이고자 자전거로 도전에 나섰으나 모두가 피서를 가는 7월 말부터 8월 초를 디데이로 삼았다.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하고 도보 순례 길을 만든 한국체육진흥회가 제공하는 GPX 경로 파일과 난중일기만을 스마트폰에 챙겼다. 필자의 순례 원칙은 단 하나 ‘자전거 바퀴 앞 1m 만 보자!’였다.
뜨거웠던 여름, 13일 동안 풍찬노숙을 하며 매일 14시간씩 쉬지 않고 달렸다. 5일간은 가마솥더위에 익었고, 나머지 5일은 폭우에 젖었다. 의지는 어스름 저녁에 스러졌다가 아침햇살에 다시 살아났다. 필자가 백의종군로 위에 서니 그동안 익숙했던 서울은 낯설었고, 서울을 벗어나도 서울은 끝나지 않았다. 과천 → 안양 → 의왕 → 수원 → 오산 → 평택 → 아산시까지 도시를 나누는 자연 경계인 산과 하천은 거대한 콘크리트에 덮여서 ‘연담화(連擔化: 도시가 확대·팽창되면서 맞닿는 다른 행정구역의 시가지와 맞닿는 것)’ 되어 있었다. 뒤이어 이어지는 아산시까지의 백의종군로 여정은 심상(心想) 속의 여정이었다.
지리산에 이르러서야 백의종군로는 선명해졌는데 그 여정은 남원 → 운봉 → 구례 → 하동 → 순천까지 에움길과 크고 작은 고개를 넘어가며 섬진강을 휘돌아 남쪽으로 내려갔다. 하동에서 위로 솟아오른 길은 논틀길과 산판길을 가로질러 5만 년 전에 거대한 소행성이 떨어졌다는 합천까지 구불구불 올라갔다. 길은 가끔 아름답게 반짝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인적이 끊기고 허름하고 낯설고 거칠었고, 남녘의 마을들은 인구학적으로 소멸하고 있었다.
거칠고, 외롭고, 힘들고, 아팠던 백의종군로 그 머나먼 여정에서 필자는 백의종군로 어느 곳에서나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어려울 때마다 장군을 찾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길의 끝에 서서 필자는 장군에게 “모든 걸 버리고 내 삶에 백의종군하겠다”라고 고해성사한다. 그가 백의종군로 여정 끝에서 만난 것은 긴 인생의 시간을 돌고 돌아와 자신을 기다리던 그였다고.
백의종군로는 무한한 우회 길이 있으나 필자는 복원된 백의종군로 이외에는 따로 거리와 길을 기록하지 않는다. 돌아가고, 잘못 가고, 되돌아오고, 중간에 마실 간 길을 더하면 700㎞는 훌쩍 넘겼다.
백의종군로는 도보로도, 자전거로도, 길에서 잘 수도, 숙소에서 잘 수도, 한 번에 갈 수도, 여러 번으로도 나누어 갈 수도 있는 여정이다. 백의종군로에 무한한 우회 길이 있듯이 순례길에는 선택 가능한 무한한 형태의 조합이 있기 마련이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하면 되기에 체력과 기술이 없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필자는 말한다.
그는 “만일 내가 ‘강철 체력’이었다면 아마 이 길의 끝에 서지 못했을 것”이라며 “게다가 이 길에는 이순신 장군이라는 든든한 백이 함께 하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삶이 정말 견디기 힘든 시기가 온다면 그때 백의종군로에 홀로 서보라!”라고 권하는 필자는 “1m 앞만 보면서 가보라. 머언 길의 끝에 서서 기다리는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필자는 자전거로 백의종군로를 주파하면서 세파에 거칠어진 그의 마음을 인정으로 촉촉하게 적셔준 임실, 순천의 자전거 가게 주인장과 길에서 격려해주신 많은 분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고 말한다. 그리고 앞서간 도보 여행자들에게도 감사를 드리는데 그들이 남긴 꼼꼼한 기록이 순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고. 그리고 멀고 거친 길을 끝까지 나와 함께 한 자전거 ‘굴렁이’에게도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