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을사년(乙巳年)입니다. 과거로 눈을 돌려보면 을사년에는 유난히 을씨년스러운 사건이 많았던 해입니다. 사전을 찾아볼까요. ‘스럽다’는 명사 뒤에 붙어서 어떤 성질이 있음을 뜻하는 접미사죠. 여기서 을씨년의 어원이 을사년에서 왔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게 맞다면 그 을사년은 1905년을 가리킬 겁니다. 을사늑약이 있었던 해지요. 우리 민족의 주권이 사실상 일제에게 넘어간 치욕의 해였습니다. 을사년에는 4대 사화인 을사사화도 벌어졌죠. 1545년 명종이 즉위한 해에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윤임 일파의 대윤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었습니다.
2025년에는 정치와 국제 질서의 혼란이 예고됩니다. 미국에 새 대통령 체제가 들어섭니다. 미국과 중국, 미국과 러시아는 이전보다 더 심하게 대립할 겁니다. 우리를 적대국으로 규정한 북한의 새 헌법 체제는 남북 간의 격랑을 예고합니다. 이스라엘과 중동 간의 전쟁, 남중국해의 영유권 분쟁은 여전할 겁니다. 무엇보다 국내 정치 상황이 을씨년스럽습니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끝이 보이지 않는 살얼음판 정국이 전개되고 있죠.
십이지간을 따지는 사람들은 한해를 동물에 빗대서 소망을 담습니다. 2024년 갑진년은 청룡 해였죠. 이렇게 따지면 2025년은 푸른 뱀띠 해입니다. 십이지간에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겠죠. 예측보다 전망, 전망보다 대안을 추구하는 미래연구그룹의 입장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가슴에 푸른 꿈을 품고 날카롭게 주변을 응시하며 유연하게 몸놀림을 하는 존재가 청사(靑蛇)라면, 우리는 을씨년스러운 국내외 환경이 조성될 2025년을 푸른 뱀의 자세로 돌파해도 좋을 듯합니다. ⟪시그널 코리아 2024⟫의 서문에서 이명호 (사)케이썬 이사장은 시그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새로운 트렌드가 될 수 있거나, 기존 트렌드를 바꿀 수 있는 이벤트를 시그널(signal)이라고 한다. 트렌드가 기정사실이 된 새로운 경향을 의미한다면, 시그널은 트렌드가 될 새로운 변화의 조짐을 의미한다. 시그널을 무시하고 기존 트렌드에 안주하였다가는 개인은 물론 가족, 기업, 조직, 국가가 급변하는 상황에 대비하지 못하여 위험에 처할 수 있다. 트렌드가 연속성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다음은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면, 시그널은 불연속성을 강조하고 ‘만약에’라는 질문을 하도록 한다. 시그널을 성급하게 새로운 트렌드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상황에 민감하더라도 행동은 조심스럽게 하며 변화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끈기와 유연함이 필요하다.
미래학회가 규정한 시그널의 의미는 묘하게도 푸른 뱀의 자세를 닮았습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정세를 헤쳐 나갈 예리한 눈과 유연한 몸짓이 그것입니다. 푸른 희망이라는 심장을 장착하고 말이죠. 이쯤에서 지난해 미래학회가 뽑은 14개 부문별 시그널을 살펴보겠습니다.
1. 미래 문화: 멀티모달의 알파플러스 세대가 구원하리라
2. 사회: 신바벨 시대가 온다
3. 인구: 뉴딩크족의 카르페 디엠
4. 노동: 크리에이티브 에이지의 디지털 르네상스 도래
5. 직업: 레인보우 칼라, 미래 인재가 등장하다
6. 과학: 넷휴먼
7. 기술: 브레인 칩
8. 지식: 딥·마이스터, AI를 지휘하며 초월 지식 창조
9. 인공지능: 커스터마이즈된 콘텐츠
10. 정치: AI 크러시가 온다
11. 건축: ‘하이퍼리좀 시티’와 ‘바이오필릭 생태도시’
12. 의료: 메디컬 패러독스
13. 환경: ECG 인플레이션
14. 국방: 보이지 않는 윤리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각계 미래연구자가 예측한 2024년 시그널 가운데 일부는 지난 1년 사이에 우리 앞에 또렷한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얼마 전 전북 전주의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사, 동급생의 얼굴 사진을 나체 사진에 합성해 유포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비슷한 사건이 잇따르자 정부는 딥페이크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국방 분야(조상근)에서 제시한 보이지 않은 윤리 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기술 분야(윤석만) 시그널이었던 브레인 칩도 성큼 다가왔죠. 일론 머스크가 거느린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개발 기업인 뉴럴링크는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에 착수했죠. 사지마비 환자가 생각만으로 컴퓨터의 마우스를 움직이는 데 성공한 겁니다.
건축 분야(윤재은)에서 제시한 하이퍼 리좀 시티의 청사진도 나옵니다. 현대건설이 2047년 미래 모습을 상상한 캠페인 영상 속에서 부유식 이동형 야구 스타디움과 지구-화성 하이퍼루프 이미지를 공개했죠. 딥·마이스터(부경호)의 시그널도 있었죠. 원로 만화가 이현세 작가가 ‘AI 이현세’ 프로젝트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뉴 바벨(윤기영)은 또 어떻습니까.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AI폰을 선보였습니다. 내장된 AI로 인터넷 연결 없이도 실시간 통역, 문서 요약, 사진 보정 등의 기능을 이용할 수 있게 한 겁니다. 커스터마이즈된 콘텐츠 전망(방준성)은 국내외에서 라이프 스타일을 추적하는 ‘초개인화’ 제품과 서비스가 잇따라 출시되면서 트렌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벤트가 저희가 ⟪시그널 코리아 2024⟫를 펴낸 뒤 일 년 사이에 벌어졌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이번 ⟪시그널 코리아 2025⟫에서는 14개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때론 발랄하면서 묵직하게 다가올 시그널이 다음과 같은 14개 질문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1. 미래 일자리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_윤기영
2. 인공지능이 전통적인 사무실을 완전히 무너뜨릴까 _이명호
3. 미래의 전쟁, 포탄이냐 식량이냐 _이창인
4. AI 튜터가 모든 교육을 대체할 수 있을까 _김홍열
5. 종교 없는 영생이 트렌드가 되면 기존 종교는 몰락할까 _김헌식
6. 미중 반도체 전쟁에서 한국은 살아남을까 _부경호
7. 양자컴퓨터가 기존 암호 체계를 무너뜨릴까 _이재우
8. 신경과학이 우리의 운명을 바꿀까 _박제윤
9. 불로장생 사회에서는 어떤 혼란이 올까 _윤석만
10. 적대적 AI 공격과 방어를 위한 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_방준성
11. 한국 정치는 지금의 복합 위기를 감당할 수 있을까 _윤영상
12. 드론은 미래 전쟁의 승패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_조상근
13. 해수면 상승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수중도시에서 살아야 할까 _윤재은
14. 지구 열탕화 속에서 우리는 삼아남을 수 있을까 _강찬수
시그널 코리아는 (사)미래학회에서 활동하는 각계 분야 전문가가 참여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책을 내는 목적은 단순합니다. “트렌드에 앞서는 시그널에 주목하자.” 그리하여 개인과 조직, 사회와 국가가 미래의 불확실성에 영민하고 유연하게 대처하자. 시그널을 읽는 모든 분에게 행운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굿 이어, 굿 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