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체제의 질문에 ‘나의 언어와 나의 문학과 나의 역사와 나의 사상은 이것이라고 대답하기 위한 고군분투’, 근대한국학의 형성 과정
이 책은 크게 보아 ‘근대한국학의 지적 기반 성찰’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찰’이 말 그대로 발본적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한국학’이란 것이 하나의 온전한 학문이기는 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우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한국어학, 한국문학, 한국사학, 한국철학 등은 물론 어엿한 분과학문으로서 각각 그 나름의 연구 대상이며 방법론 등에 대한 일정한 합의가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한국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앞서 언급한 몇몇 분과학문을 그저 한데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한국학’이란 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개별 학문이라기보다는 인문학, 자연과학, 공학 같은 것들처럼 몇몇 학문들을 특정 기준에 따라 분류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국학’이 몇 가지의 분과학문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그 분류의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고전적 의미의 제국을 해체하고 근대에 그 모습을 드러낸 국민국가(nation-state)라는 단위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국민국가는 말할 것도 없이 다수의 서로 다른 국민국가들로 구성된 근대의 세계체제(world-system)를 전제로 한다. 제3세계의 자국학은 사실상 자신이 이 세계체제에 진입할 만한 어엿한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구축해 나가야만 했던 담론이었던 것이 아닐까. 세계체제는 묻는다, 너는 누구냐고. 그러한 질문에 나의 언어와 나의 문학과 나의 역사와 나의 사상은 이것이라고 대답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바로 근대한국학의 형성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소수 언어는 끊임없이 사멸해 가는데, ‘국어’의 숫자는 국민국가의 수만큼 자꾸만 늘어가는 이유 역시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국어’의 수만큼 ‘국사’와 ‘국민문학’이 존재하는 것은 마치 국민국가마다 저 나름의 화폐와 의회와 군대와 교육 제도가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각국의 화폐가 환율에 따라 등가 교환되듯이 ‘국어’는 다른 ‘국어’에 의해 (등가로) 번역되어 국민국가마다 개개의 고유한 사상과 미학이 존재한다는 ‘상상’을 가능케 한다. 근대전환기 조선이 ‘지知’의 대상으로 호출된 것은 우선 서구의 동방학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의 조선학과 해방 이후 지역학으로서의 Korean Studies의 경우를 생각해 보더라도, ‘한국학’이 처음부터 타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은 자명하다. 물론 그때마다 타자와의 대결을 통해 참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국민국가의 자장 안에 머물러 있다면, ‘한국학’은 전혀 의도치 않게 여전히 세계체제에 복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