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을 대표하는 시인 이홍섭이 여섯 번째 시집 『네루다의 종소리』를 펴냈다. 달아실시선 84번으로 나왔다.
1990년 등단한 강릉 촌놈 이홍섭이 시인!으로 운수납자!로 탕아!로 산 지 28년 만에 다섯 번째 시집이자 달아실시선 제1번 시집인 『검은 돌을 삼키다』를 냈을 때 시인 박제영은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들리는 어떤 울음”이라며 이렇게 부연했다.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의 숨결을 찾아 동가식서가숙하며 강릉, 프라하, 함흥을 지나 세상의 모든 터미널을 떠돌다가 때로는 불목하니로 때로는 운수납자雲水衲子로 때로는 탕아 되어 세상을 떠돌다가 마침내 검은 돌을 삼킨 시인 이홍섭은 사자후했다. 나는 이제 정녕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었으니 참으로 건달이나 되어야겠다! 그가 돌아와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서 때로는 성聖을 지우고 때로는 속俗을 지우며 성속이 엉킨 이홍섭만의 서정을 빚어내는 것이니, 그가 갈 데 없는 건달이 된 것은 독자에게는 참 큰 복이겠다. 검은 돌을 삼키면 어떤 울음이 흘러나올까? 서쪽을 생각하면서 동쪽의 건달을 떠올리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번 시집 『네루다의 종소리』에 대해 시인 박제영은 이렇게 “시의 안팍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라며 이렇게 부연했다.
“이홍섭 형이 7년 만에 보내온 신작 시집(『네루다의 종소리』) 원고를 읽다가 그만 먹먹해졌다. 그사이 유발상좌有髮上佐의 연으로 모셨던 스승(오현스님)이 입적하고 형은 죽도록 아팠구나. 의사들도 속수무책이라는 신병神病을 앓았구나. 그리하여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가 마침내 시로 현현하였구나. 편 편마다 쇠북 아닌 것이 없고, 울음 아닌 것이 없고, 편 편마다 종소리를 머금었으니, 읽는 내내 슬픔이 무장무장해지고 먹먹해지는 까닭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형이 세운 ‘가난하지만 이쁜 나라’(「들국」)로 기꺼이 망명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이번 신작 시집을 펴내면서 이홍섭 시인은 〈시인의 말〉과 〈시인의 산문〉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돌이켜보니, 존경과 사랑이 넘칠 때 시도 충만했던 것 같다. 한동안 시를 쓰지 못하면서 내 속에 넘치던 존경과 사랑이 다 어디로 사라져 갔을까에 대하여 깊이 참구했다.// 시집을 엮는 내내 경포호수 습지에서 만난 적이 있는 자주색 가시연꽃이 자꾸만 생각났다. 꽃이라기보다는,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외치는 주먹손 같았던 가시연꽃. 그 작은 꽃이 온몸에 가시를 두른 것이 참으로 처연했다.”(「시인의 말」)
“오래전, 기억의 저편에 해질녘에 들었던 종소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작은 도시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던 사원에서 퍼져 나오던 그 저녁 종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일순 평화롭게 만들었고, 마치 비단 천을 덮듯 천천히 도시의 하루를 쓸어 담았다.
신기하게도 그 종소리가 그친 뒤에는 사람보다는 다른 생명이 주인공이 되었다. 바람 소리, 소나무 쓸리는 소리, 물결 소리, 귀뚜라미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살아났고, 나무와 풀의 냄새도 깊숙이 들어왔다. 저녁 종소리는 숱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잡소리들을 잠재우면서, 잊었던, 혹은 저쪽으로 밀려났던 생명과 감각들을 다시 살아나게 했다.
며칠 전, 문득 그 저녁 종소리가 그리워졌다. 이제 도시의 사원에서는 저녁 종을 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아직도 치고 있는데 나에게까지 들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예전보다 저녁은 훨씬 늦게 오고, 밤낮의 구별도 거의 없어졌으니 이제 저녁 종소리는 그 의미가 무색해졌다. 더불어 사람이 주인공인 시간도 그만큼 길어졌고, 다른 생명은 뒷전으로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그런데 뜬금없이 난 왜 그 저녁 종소리가 그리워지는 것일까. (…중략…) 문득 종소리가 떠올랐을 때, 시가 종소리를 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종을 누가 치는가 하는 질문은 저 산속의 수좌들이 깨치고자 하는 화두 속에나 있는 것이고, 시인은 다만 건달처럼 그 종소리를, 그리고 그 외의 숱한 종소리를 부단히 담아낼 뿐이다. 화장터의 연기도 종소리고, 어머니의 울음도 종소리고, 노스님의 재도 종소리다. 구름과 새와 서쪽 하늘도 참으로 아름다운 종소리이다. 시인은 하루하루 그 종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 담아내는 존재가 아닐까. 배가 고파서, 늘 허기가 져서 그 종소리로 배를 채워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좋은 시는, 아니 내가 쓰고 싶은 시는 이 종소리가 시의 안팎에서 울려 퍼지는 시다. 종소리의 시작도 아니고, 종소리의 끝도 아닌, 늘 종소리가 웅웅한 시, 종소리를 머금고 있는 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히 내 몸을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길목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종소리를 머금을 수 있지 않겠는가.”(시인의 산문, 「종소리를 머금다」)
야밤에
불현듯 깨어나
시를 쓰는 날이 잦다
부모님은 살아 계시고
아이는 아직 어리고
갈 길은 먼데
벌떡 일어나
자기 가슴을 치는
고릴라처럼
궁한 귀신처럼
나는 무엇을 끄적이려 하는가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떠났고
서녘 노을 아래
빈 과녁들만 어지러운데
나는 왜
불현듯 깨어나
시를 쓰고 있는가
꿈꾸다 죽은 노인보다
꿈을 죽인 노인으로
자기 가슴이 다 부서진
고릴라처럼
그렇게 살다가
가고 싶은데
이 야밤에
시는 왜 다시 찾아오는가
- 「아생」 전문
세상은 여전히 숱한 물욕의 소리들로 가득하고, 자기 생존을 위한 방편의 온갖 술수들로 소란하다. 문학과 예술이 그런 비정상의 사태를 오히려 부추기기까지 하는 일그러진 세상이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이 시집을 읽으시라. 이홍섭의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귀를 씻는다는 것이고, 마침내 고요에 들 종소리를 듣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