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으로써 충만해지는 인간을 말하다
인류세 시대에 다시 읽는 다석의 인간학
첨단 과학기술로 인간의 신체적·정신적 능력을 극대화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그로써 인간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다석 류영모에 따르면 인간의 자기 초월은 ‘자기 긍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부정’을 바탕으로 삼을 때 가능해진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삶의 숭고함을 보고, 무능을 통해 상호 의존과 공생의 방식으로 생명 살림을 이루며, 무지함을 통해 인간 언어와 인식 너머에 있는 신비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간’ 자체가 문제가 된 시대인 지금의 인류세에 다석의 철학을 다시금 읽는다. 다석의 인간관을 반영하는 ‘자기-초월의 인간학’부터, 다석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하나’와 ‘생각’ 그리고 ‘고디’, 다석이 그리스도 신앙을 바탕으로 동서양 사상을 융합해 창조한 종교 담론, 다석 고유의 용어인 ‘정음’과 ‘씨알’과 ‘빈탕’ 등을 두루 살펴본다. 이 땅에서 인간 그리고 인간의 영성을 천착한 다석의 사유를 오늘의 관점으로 접할 수 있다.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
한국의 그리스도교 사상가이자 ‘서양 문명과 문화의 골수를 동쪽의 문명과 문화’의 뼈에 집어넣은 동서회통의 철학자다. 호인 다석은 ‘많은 저녁’을 뜻한다. 35년간 YMCA 연경반(硏經班) 모임에서 경전을 가르치고 ≪성서조선≫과 같은 잡지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한 애국계몽 운동가이기도 하다. 순우리말로 ≪노자≫와 ≪중용≫을 완역했으며, 1955년부터 1974년까지 20년 동안 직접 기록한 일기와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다석일지≫를 남겼다. 류영모는 평생 은둔하며 살았지만, 그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인물들이 그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널리 알렸다. 류영모의 제자 중 대표적 인물로는 함석헌이 있다. 류영모가 숨을 거두며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아, 바, 디’였다. ‘아’는 감탄사, ‘바’는 밝다는 빛의 구현, ‘디’는 디딘다는 실천적 삶을 뜻했다. 류영모의 삶에서 나온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그가 한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