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지해 김용정 선생이 남긴 말씀과 글들을 토대로, 추모 5주기를 앞두고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제자 윤용택이 글의 눈높이를 맞추어 다듬어 엮은 책이다.
이 책을 발간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는데, 2023년 초 미국에 사는 범산 최종일 거사가 1981년 미국 볼티모어 성불사에서 가졌던 불교강좌 녹음파일을 디지털 파일로 전환해서 안승신 여사에게 보내왔다. 안 여사와 범산 거사는 40여 년이 지난 강의이긴 하나 다시 들어보니 아련한 옛 추억으로만 간직하기엔 너무나 아쉬운 마음이 일어서 이것을 녹취하여 책으로 내 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녹취 원고를 만들고 보니 한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하기에는 분량이 적어서 윤용택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윤 선생은 스승 김용정 선생이 발표했던 글들을 두루 찾아보았고, 지해선생이 출간한 기존 저서에는 수록되지 않은 불교, 과학, 철학과 관련된 글들이 꽤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글들은 각각 다른 청중과 독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단행본으로 묶어내려면 글의 높낮이를 조정해야만 했다.
지해선생은 2019년에 12월 24일에 이승을 떠나셔서 의문 나는 내용들을 직접 여쭐 수는 없었지만 스승을 그리는 마음을 담아 이 책과 인연이 될 독자들이 불교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불자, 과학도, 철학도임을 감안하고, 그 글들의 어떤 부분은 보강하고, 어떤 부분은 더러 생략하기도 하면서 아래와 같이 4부로 구성하였다.
1부 〈불교, 과학, 철학의 삼중주〉는 지해선생이 1980년 9월부터 1년간 연구년을 얻어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방문교수로 계실 때, 볼티모어 성불사에서 1981년 1월부터 8월까지 교수, 대학원생, 의사들을 대상으로 열었던 불교강좌를 녹취한 강의록이다. 말은 글보다 이해하기가 쉽지만, 그것을 글로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리되어 불교, 과학, 철학을 넘나드는 지해선생의 아름다운 강의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2부 〈「반야바라밀다심경」 강의〉는 월간『불광」 지에 연재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뉴욕 원각사에서 열렸던 강좌 내용 일부를 추가하여 보완한 것이다. 지해선생은 「반야심경」 강의를 여러 차례 한 적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1980년 겨울 뉴욕 맨해튼 원각사와 1995년 여름 한국불교발전연구원에서 한 것이다. 후자의 강좌 내용은 월간 「불광」 255호~266호(1996년 1월~12월)에 ‘궁극의 이상세계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정리되어 있다. 여기서는 어째서 「반야심경」이 고통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경전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3부 〈철학, 과학과 불교를 만나다〉에는 지해선생이 한창 열정적이던 40대부터 학문이 무르익은 70대까지의 글이 실려 있다. 이것들은 현대과학과 현대철학, 그리고 선(禪)불교와 관련된 내용들이어서 다소 어려운 감이 없지 않다. 여기서는 불교가 2,500년이 넘은 역사가 오랜 종교이지만, 현대과학과 현대철학에 많은 영감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가 나아갈 길을 가르쳐줄 21세기 종교로서 으뜸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4부 〈과학, 불교와 철학을 만나다〉는 (주)범양사에서 발행했던 계간 「과학사상」에 실렸던 글을 다듬은 것이다. 「과학사상」은 “과학은 물질적 풍요에 국한하지 않고 철학과 종교와 함께 인간과 사회의 선(善)을 이루고 생태계 파괴를 막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라는 취지로 1992년 창간하여 총 50호가 발간되었다. 지해선생은 1995년부터 2005년까지 편집인을 맡으면서 서양의 과학문명과 동서고금의 철학사상을 접목하려 애를 쓰셨다. 여기서는 현대과학과 환경문제에 대한 저자의 성찰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실린 글은 저자가 3, 40년 전에 쓴 글들이다. 6개월이 멀다 하고 새로운 과학기술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 글들이 여전히 의미가 있고 유효한지 확인하이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기술이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고, 철학과 불교가 좀 더 대중 속으로 다가가고 있으며, 과학, 철학,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면서 지해선생의 글들이 더욱더 설득력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게 되었다.
학문에서 새로운 이론이나 학설이 탄생하여 일반 대중들이 믿고 따르는 세계관으로 정립되기까지는 수십 년, 수백 년이 걸린다. 그리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사라지기도 한다. 지해 김용정 선생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70년대부터 불교와 과학이 만나는 현장을 목격하고, 문헌을 통해 수많은 선지식, 철학자, 과학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불교적 세계관을 통해서 대중들이 현대과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였으며, 현대과학과 동서고금의 철학을 통해서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드러내 주셨다. 이 책은 불교를 중심에 놓고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사상과 현대과학의 내용들이 종횡무진하고 있어서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지만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책이다.
지해 김용정 선생은 철저한 합리주의자이면서도 심오한 강의를 할 때는 가끔 신비적인 이야기를 통해 모두를 강의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능력을 지닌 분이셨다. 독자들도 이 책에서 불교, 과학, 철학이 엮어내는 삼중주를 들으면서 희귀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