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5월시’ 동인,
고희의 언덕에서 빚은 시의 결정
나종영 시인은 1980년 5.18민중항쟁 직후 결성된 ‘5월시’ 동인 중 한 명이다. ‘5월시’ 는 군부독재의 폭압 아래 다수의 문인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결성된 시 동인지로 이른바 1980년대 ‘무크 붐’을 일으키며 한국문학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번 시집은 2001년『나는 상처를 사랑했네』 이후 23년 만에 펴내는 시인의 역작이다. 광주의 아픔과 진실을 밝히려는 초기 시 이후 분단된 민족문제와 참담한 민중현실 그리고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를 노래해온 시인의 여정이 어느새 ‘고희’에 이르러 더욱 깊고 넓은 시적 결실을 맺고 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빈속의 대나무도//몇 번은 둥글게 휘어져야/제 몸의 마디를 지킨다//그 청절한 마디마디의 힘으로/불의에 꺾이지 않고//땅속 깊이 뿌리를 뻗어/비로소 한 생명을 피워 올린다//저 산이 울면 대나무는 죽창이 되고/저 강이 울면 어린 죽순도 화살이 된다.(「청죽靑竹」전문)
이것이 사랑이라면/가만히 무릎을 꺾고 그대 앞에/눈물을 훔치리/이것이 그리움이라면/그대 눈빛 속에/남아 있는 저녁 물빛으로/마른 가슴을 적시리/사랑은 그것이 사랑이고자 할 때/홀연 식어서 가을 잠자리처럼 떠나가므로/나는 깊은 새벽 산기슭에/한 잎 붉은 얼레지로 피어나겠네/이것이 사랑이라면/그대 앞에 꽃잎의 그늘을 어루만지는/시린 물방울,/그것의 침묵이 되겠네.(「엘레지」전문)
휘어짐으로써 마디를 지키고 뿌리를 뻗어 한 생명을 피워올린다는 청죽의 자세는 여린 꽃잎 앞에서 사랑을 위해 무릎을 꺾고 그 꽃잎의 그늘을 어루만지는 자세와 다르지 않다. 시인에게 꽃은 “상처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꽃은/이 세상의 모든 꽃들은/상처의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꽃은/꽃잎의 이면에 비밀스레 감추어진/눈물샘과 아린 상처로 인해/꽃들은 더 아름다운지도/모른다”(「꽃은 상처다」)
이처럼 사물과 세계에 대한 시인의 따스하고 겸허한 자세는 풀, 꽃, 나무, 숲, 깡통, 연탄, 촛불, 노을, 별 등의 사물과 교감하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궁극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숙고하게 해준다. 또한 5·18, 4·3, 세월호, 용산역 참사와 같은 불의한 사건들을 어떻게 응시하고 실천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인지 이번 시집은 “‘가난한 세월’에도 물들지 않는 ‘물염의 시’”(정희성 시인), “억압받는 민중과 함께하고자 하는 유교적 선비의 자세”(임동확 시인), “오래 묵고 벼린 말[言]로 된 사리”(김형중 평론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