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의 펜을 꺾고 소설가의 펜을 쥘 결심
최이아의 블랙 코미디 SF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우수상 수상작 「제니의 역」 수록
“첫 작품부터 무섭기 시작해서 끝까지 정말 현실적으로 너무 무서웠다. (…) 이런 글쓰기가 가능하려면 사회구조에 내재된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날카로운 인식이 있어야만 한다. 그 인식이 작품마다 스며 있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욱 무시무시하게 빛나는 것이다.”
_정보라(소설가) 추천사 중에서
날카롭고도 근본적인 통찰로 빚은 세계
공포와 해학을 갈아 넣은 이야기들
혐오와 멸시와 불평등이 일상에 만연한 이 땅의 우리에게는, 이토록 작의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소설이 아직은 필요하다고 여겼다.
_구병모(소설가, 「제니의 역」 심사평 중에서)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작은 욕망에서부터 스스로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이는 젊어지고 싶은 마음, 성공하고 싶은 마음, 심지어 지구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부터도 시작된다. 작은 소망에 불과했던 욕망에 집착할수록 그것은 커다란 파도로 변해 등장인물들의 세계를 쓸어버린다. 최이아의 소설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욕망의 그림자에 가려진 사람들을 주목한다. 수상한 시술을 받고 실종된 딸의 행방을 알고자 하는 어머니(「갈아드려요」), 두 손이 불타고 있어도 성공을 위해 평생 노예 계약서에 서명하는 청년(「랩에서 생긴 일」)….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에는 자신의 욕망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결국 좌절하는 모습과 욕망의 위험성을 인지한 사람들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뒤섞여 있다. 작가는 그 모든 행동에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독자에게 보여준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자비 없는 전개와 말초적인 카타르시스를 주는 반전에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문득, 욕망이라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의 시작을 여는 「갈아드려요」는 젊음을 추구하는 욕망의 부작용을 말한다. 수진은 K-뷰티를 다른 행성으로 전파한 1세대 뷰티 코디네이터다. ‘눈에 띄는 것은 가꿔야 한다’라는 말로 행성인을 설득해서 미의 저변을 넓힌 수진은 팔자주름이 생긴 자신의 얼굴 때문에 실적이 줄어드는 것이 불만이다. 그래서 신체 나이를 줄이는 인공 혈액 시술에 집착한다. 5리터의 피를 교체하기 위해 수진은 발버둥 친다. 빚이 아무리 불어나도, 인공 혈액의 제조 과정이 아무리 수상해도 수진은 피를 고집한다. 최이아의 과학적 상상력이 곁들여진 “불로장생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상품이 된”(정보라, 소설가) 세계관은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미를 향한 욕망이 어떤 모양으로 개인을 갉아먹는지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얼굴을 뜯어보는 시선이 어떻게 개인을 몰아세울 수 있는지를 말이다. 인공 혈액이 무엇으로 만들어지는지 밝혀지는 마지막 순간, 「갈아드려요」라는 제목에 숨겨진 두 가지 의미를 알아챌 것이다. 그리고 수진 또한 오늘날의 우리처럼 노화와 시선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소설 「인류감소정책 추진에 대해」는 블랙 유머를 통해 권력과 과학기술이 결합되면 어떤 괴물이 탄생하는지를 해학적으로 보여준다. 비밀 조직에 소속된 ‘나’는 첫 문단부터 “기후 변화를 늦추기 위해서는 인류를 현 수준의 100분의 1로 죽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43쪽)라고 자랑스럽게 외친다. 물론 ‘나’가 주장하는 논리는 얼토당토않지만 그 안에는 인류에 대한 사명감이 가득하다. 지구의 가장 큰 가해자라는 냉소 섞인 농담을 ‘나’는 진심으로 믿고 시행한다. 버튼을 누르듯 간단하게 시행된 인류 학살은 마지막의 아찔한 반전을 통해 사회의 권력 피라미드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최이아는 “내 안에 깊이 녹아 있는 비열한 면모를 마주한” 것이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의 토대가 되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말했다. 이 토대가 SF라는 장르와 버무려져 나온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는 자신이 선량하다고 착각하는 개인들에게도 비열한 면모가 있을 거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할까?
“부디 다음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길 바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함께할 수 있는, 언어의 모든 틀을 초월한 방식으로.” _「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 중에서
언어에 대한 최이아의 예리한 통찰은 표제작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를 통해 빛을 발한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경구를 “무서워서 말도 못하겠네”(69쪽)라고 비웃는 사람들 앞에 말을 함부로 하면 ‘큰일’이 나는 세상이 펼쳐진다.
로지먼트종합병원 로비에서 원인 모를 바이러스가 퍼진다. 타인에게 공격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괴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몸의 통제를 잃고 질주하다 벽에 머리를 박거나, 차도에 뛰어들어 죽음을 맞는다. 사람들이 당황하는 사이 이 증상은 순식간에 퍼져 세계적인 재난이 된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병원은 폐쇄되는데, 이 사태를 예견했던 언어학자 아진과 그의 이론을 폄하했던 아진의 전 연인 레지던트 선린이 병원에 갇히게 된다. 언어의 틀에서 말하거나 생각하면 감염되는 피할 수 없는 미지의 바이러스. 이 바이러스의 정체에 도달하기 위해 선린은 아진의 이론을 인정한다. 아진은 선린의 의견에 맞춰 자신의 가설을 수정한다. 선린과 아진은 언어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지 깨닫는다. 사실 중요했던 것은 소통 도구에 불과한 언어가 아니라, 이어지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쌓아온 시간이었다. “서운하고 짜증 나고 화도 났지만 그럼에도 소중한 관계의 흔적들”(150쪽). 어쩌면 연대란 무거운 결의도, 필사의 각오도 아닌 훨씬 부드럽고 따뜻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에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연대하는 인물들이 있다. “어디에 있든 함께할 수 있는”(141쪽) 소통 방법을 고민한 아진과(「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 옆집에 시집온 이주 여성의 누명을 풀기 위해 “이주 여성들은 자신의 언어로 자신 있게 말하기만”(247쪽) 하면 된다고 독려한 다은의 엄마처럼(「제니의 역」) 최이아는 타인과 스스로를 상처 입힐 수 있는 ‘욕망’을 삭제한 세상을 잔인하게 그리면서도, 사람은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는다.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 욕망이 파괴된 세상 속에 무엇이 스며들어 그것을 재구성하는지 지켜볼 수 있는 소설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