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내용(아침은 함부르크로 온다. 산책, 109. 기유 이야기. 대기맨)
아침은 함부르크로 온다
아버지의 졸음운전 이후 우리 가족은 여러 가지 일을 겪은 후에 장례식장이 내려다보이는 요양원 7층의 구석진 곳에 있는 병실에서 살게 된다. 어려서부터 몸이 서서히 마비되는 병을 앓아 서른 살부터는 목 위쪽에만 감각이 살아남은, 그러나 터치펜을 입에 문 채, 그것으로 노트북의 화면을 조정하는 동생 병우와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내고 엄마가 돌아가시자 정신줄을 놓쳐버린 아버지가 전부다. 좀처럼 변화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일상을 뒤흔든 것은 대학 시절에 보았던 안젤라다. 그녀는 ‘아버지와 동생과 나까지 사내 셋만 살고 있는 우리의 대기권’, 좀처럼 포장할 수 없는 가족사에 거의 무단으로 진입하여 전에 없던 변화를 이끌어낸다. 안젤라가 알려준 병우의 비밀 덕분에 나는 야간 경비 일을 그만두었고, 요양원 근처에 빌라를 샀으며, 요양원이 정한 날짜 이전에 병실을 비울 수 있었다.
산책, 109
여강은 작업실과 계곡마을인 적동을 오가는 인물이다. 그리고 ‘나’는 ‘여강’의 산책이 몇 회인지를 헤아릴 수 있고, 그녀의 육체는 물론, 감정변화마저 포착할 수 있는 그녀의 태아다. 여강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산책을 반복하는 이유는 그녀가 만철과 살고 있는 적동의 재개발로 두 사람의 의견차가 좁힐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속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친구 ‘수’에 대한 그리움이 가볍지 않아서이다. 나의 생각이 여강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여강은 나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영향력은 나의 방대한 기억이 티끌처럼 흩어져버릴 미래 즉, 자궁을 벗어나는 순간에야 멈출 것이다. 문제는 여강과 나에게 이 순간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형태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앞으로 세 사람은 어떻게 될까?
기유 이야기
물이 고여 있는 못이 일상성을 유지하려면 쉼 없는 자정작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못의 한 귀퉁이에 어린이가 누워있다면 어떨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인지 알고 싶었다. 왜 고개를 돌릴 수 없고, 손과 다리를 굽힐 수도 없으며, 눈을 감을 수 없는 건지도. ‘엄마’는 ‘기유’의 헤져서 너덜너덜한 비니 조각을 입에 물고 온 강아지 ‘기유’를 “쓰레기 뒤지지 마. 더럽잖아.” 라며 혼내기까지 한다. 지척에서도 ‘기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엄마아빠’. 이런 두 사람이기에 그들이 한참을 옥신각신한 후 경찰서로 가는 순간 ‘기유’는 물속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기유’로 은유되는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 장차 후회할 ‘엄마아빠’의 모습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아주 소중한 것’이 있지 않는지…….
대기맨
사장 할머니의 운전기사였던 아버지는 경찰이 마약 밀매업자 황 씨를 검거하기 위해 황 씨의 어머니인 이 씨의 저택을 급습했던 날, 마약견에게 다리를 물어뜯기는 바람에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다. 엄마가 ‘소심한 남자가 고용주에게 과잉 충성을 바친’ 결과라고 말하는 이 사건 이후 아버지는 사장 할머니에게 다가오는 낯선 이를 막기 위해 내내 긴장해야 했던 운전수이자 경호원이라는 자리를 잃고, 저택 앞 골목과 주변을 비추는 CCTV의 녹화 테이프를 다시 돌려 보고 얻은 정보 즉, 저택을 주시하는 잠복 경찰이나 수상한 사람의 동태를 살핀 후에 보고하는 것. 아버지 말에 의하면 세상을 구경하는 일을 얻는다. 아버지는 옥상에 앉은 채 고깔모자의 뾰족한 꼭대기 또는 하늘의 일부거나 집의 연장선으로 보이는 ‘대기 씨’가 되어가는 대신 자신과 가족의 일상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