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국력 신장을 위해 노력한 군주!
왕권의 강화에는 규장각의 인재를 조정에 절벽의 독수리처럼 배치시켜려 했다.
국력의 배양에는 신화처럼 빼어난 무사를 채용하는 방식을 쓰기로 했다.
이들 무사들한테 조선군을 훈련시키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정조는 조선 22대 임금이다. 아버지가 뒤주에서 사망한 기막힌 사연을 안은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숱한 사람들이 역사의 인물에 대해 넘겨짚어 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숱한 사람들이 정조가 독살되었으리라고 여기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출판사는 튼실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비중을 두는 관점으로 작품을 골랐다. 정조는 단종과 숙종을 참고로 삼아 자신의 위치를 굳히기에 노력했다.
정조는 1752년 9월 22일에 출생했고 1800년 6월 28일에 사망했다. 1776년 3월 10일에 경희궁에서 즉위했다. 그리하여, 24년간을 국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정조는 즉위할 때부터 2가지의 강력한 신념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하나는 절대 왕권의 구축이요 다른 하나는 강력한 국가 체제이다. 절대 왕권의 구축은 필연적인 역사적 과정 때문이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노론 관료들의 입김으로 뒤주에서 사망하지 않았던가? 이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 자신이 과거의 단종처럼 내쫓길지도 몰랐다. 왕이 되었다가 왕위에서 내쫓긴다면 얼마나 치욕스럽겠는가? 이런 일은 광해군에서 끝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조였다.
절대 왕권을 구축하려면 반란 조짐을 보이는 세력은 제거해야만 마땅했다. 정조의 분석으로는 3가지의 세력들이 불거졌다.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세력들이 하나의 위험한 집단이었다. 이 집단을 정조는 선집(先集)이라 분류했다. 즉위 직전 해인 1775년에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못하게 훼방한 세력이 있었다. 정조는 이 집단을 중집(中集)으로 분류했다. 마지막 세력은 즉위 이후에 궁궐에 난입한 세력이다. 정조를 이 세력을 후집(後集)으로 분류했다. 왕권을 구축하려면 위험한 3세력들을 제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어떤 일을 용서한다는 것이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멂을 알아차렸다. 정조가 후집을 용서하면 궁궐로 난입하려는 기운은 드세지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현상이 드러났기에 3가지의 반역 세력은 철저히 응징하기로 했다.
정조가 24살이 되던 해인 1776년 3월 10일에 경희궁에서 등극했다. 그해 7월 28일에 궁궐의 용마루를 넘어온 침입자가 있었다. 침입자는 강용휘(姜龍輝)와 전흥문(田興文)이었다. 강용휘는 궁궐 수비병이었고 전흥문은 강용휘에게 매수(買收)당한 사내였다. 7월 28일의 일로 정조는 8월 초순에 창덕궁으로 이사했다. 그랬는데 8월 11일 밤에 재차 궁궐 난입 사건이 벌어졌다. 7월 28일에 미해결되었던 일이 8월 11일에는 소상히 드러났다.
정조가 초기에는 왕권을 강화하여 내쫓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랬는데 정조의 궁극적인 목표는 힘을 갖춘 나라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체제적인 힘을 구축하려고 규장각을 세워 새로운 인재들을 기용했다. 기용된 사람들은 서얼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였다. 이들의 직제는 검서관들이었고 대사동(大寺洞) 백탑 주변의 실학자들이었다.
왕권의 강화에는 규장각의 인재를 조정에 절벽의 독수리처럼 배치시켜려 했다. 국력의 배양에는 신화처럼 빼어난 무사를 채용하는 방식을 쓰기로 했다. 이들 무사들한테 조선군을 훈련시키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새로운 무예서(武藝書)로 신형 군진(軍陣)을 설치하듯 병사들을 훈련시킬 작정이었다. 아버지의 출간물인 무예신보(武藝新譜)에는 18가지의 무예가 용(龍)의 숨결처럼 실려 있었다. 새로운 무예서의 출간은 신룡(神龍)처럼 문무를 겸비한 인물들에게 맡길 작정이었다. 무예서 편집인들을 주변국의 무관들에게 보내어 자문도 받을 계획이었다.
새로 출간할 무예서에서는 동양의 무술을 통일된 왕국처럼 집대성할 작정이었다. 무예신보의 내용만으로도 동양의 무예가 표본으로 채집되듯 망라되었다고 여겨진다. 6종의 마상 무예만 첨가되면 보물처럼 소중한 무예서가 되리라 여겨졌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른 후에는 세계적인 보배가 되기를 정조가 바랐다. 실제로 무예도보통지는 2017년에 동양의 중요한 자산으로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 처음에는 반역 세력을 제거했다. 다음으로는 규장각에 실학자들을 검서관으로 배치하여 위상을 끌어올렸다. 국력 강화를 위해서는 1794년 1월에 수원 화성의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1796년 9월에 수원 화성을 완공했다. 거중기 등 새로운 기계를 동원하여 완성한 동양의 대표적인 성곽이었다.
정조는 배를 묶어서 군사들을 이동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 단위 시간에 신속한 대군의 이동에까지 신경을 썼다.
정조는 한반도의 전래적인 약체성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국왕이었다. 종전의 5군영에다가 1793년에는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壯勇營)까지 설치했다. 이들 군대에 무예도보통지의 무술까지 보급하고 무과의 시험에까지 반영할 정도였다. 정치적으로도 선비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규장각(奎章閣)까지 세워 당당한 기틀을 세웠다.
정조에 대한 독살설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여겨진다. 정조의 사망 원인은 등에 난 종기(腫氣) 때문이었다. 이것을 치료할 때에 고름보다는 열이 많이 배출되었기에 사망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1800년 6월 28일자 기사). 24년간 재위했기에 결코 짧은 정치 경력을 지니지도 않았다. 종기는 모공(毛孔)에 세균이 감염된 질환으로 왕들의 사망 원인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세균을 다스릴 항생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인류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은 1928년에 세상에 알려졌다. 정조의 시대에는 항생제가 없었기에 한약만으로서는 종기가 치료되지 못했다. 정조가 남으로부터 독살당하여 죽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의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정조의 강력한 국력 신장의 의지도 그의 사후에는 금세 스러졌다. 후손들에 의해 정조의 공적들이 사라졌다는 점들이 아쉬움을 자아내게 한다. 정조의 수명이 조금만 길었다면 조선은 일본에게 합병되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오늘날 미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에게 쩔쩔 매는 일도 없으리라 여겨진다. 북한에서 날려 보내는 오물 풍선까지 남한을 괴롭히는 시점이 아닌가? 근대의 어떤 대통령만으로 국력을 바꾸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처지가 되었다. 과거를 반성하며 한반도의 미래를 내다보자는 취지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우리가 약할지라도 후손들에게는 당당한 강국의 위상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