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분이 이번 시집 『내 인생의 스케치』에서 내세운 주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 또는 ‘인생’이다. 80여 년의 인생을 살아낸 그녀에게 삶이란 일차적으로 ‘추억’의 대상이 된다. 시인이 말하는 “내 인생”에서의 ‘나’는 늘 변화하는 인물일 수 있다. ‘나’는 아이이자 청소년이고, 성인이자 중년이며 노인이기도 하다. 또한 ‘나’는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이며, 엄마이자 할머니가 된다. 이종분은 다양한 시편을 통해서 ‘나’를 찾고, ‘인생’을 추억하고 되새긴다. 독자들은 그녀의 시를 읽으며 스스로의 ‘나’와 대면하고,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며 상상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의 인생을 잘 살아왔고, 지금도 잘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 이종분에게 펼쳐질 인생의 궤적도 그러할 테고, 그녀의 시 세계도 그러할 것이다.
- 권온 문학평론가
이종분 시인의 『내 인생의 스케치』는 티없이 맑고 깨끗한 소녀시절과 성숙한 어머니의 시절과 그리고 이상과 현실과의 싸움을 회고하고 있는 할머니의 시선으로 구축되어 있다. 신혼 살림의 찬장이 사과 궤짝이었다는 추억(「아름다운 그림」)도 아름답고, 「쌈닭」의 투쟁 정신도 아름답고, 남편의 얼굴에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시아버님의 얼굴을 보고, 다 늙은 아내를 시아버님처럼 “며늘아기”라고 부르는 「거울」도 아름답다.
친구는 걱정이 태산이다
새 식구 들이는데 열 세평 전세라고 했더니
결혼을 할까 말까 한다고
신혼의 첫 살림 찬장이 사과 궤짝이었다면
그들은 무어라 말할까
시장 바닥에서 때 묻지 않은 뽀얀 사과 궤짝 하나 얻어다가사포로 몸단장하고 프라이팬과 냄비를 넣어 두었다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 「아름다운 그림」 전문
가난이 죄가 되지 않고 이웃과 이웃들 사이에 문이 열려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시가 되고 낭만이 있었던 것이다.
돈은 이기주의의 꽃-, ‘돈꽃’이 피면 이웃과 이웃들이 문을 닫아걸고,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도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고소-고발의 소송전을 전개한다.
신혼 살림집이 열세 평 전세라고 걱정하는 오늘날과 신혼 살림의 찬장이 사과 궤짝이었다는 지난날과 어느 시절이 더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단 말인가?
오늘날은 시도 죽었고 낭만도 죽었지만, 그 옛날에는 모든 것이 시가 되고 낭만이 되었던 것이다. 가난해도 꿈과 희망이 있었고, 이 꿈과 희망으로 우리들의 마음 속의 행복(부유함)을 펼쳐보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새 식구 들이는데 열 세평 전세라고 했더니/ 결혼을 할까 말까 한다고” “친구는 걱정이 태산”이지만, 그러나 “시장 바닥에서/ 때 묻지 않은 뽀얀 사과 궤짝 하나 얻어다가/ 사포로 몸단장하고 프라이팬과 냄비를 넣어 두었”던 그 옛날의 신혼시절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해학과 풍자의 극치-. 웃음과 여유가 있고, 따뜻하고 훈훈한 인심과 사랑이 묻어 있다.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가 거울처럼 맑고 투명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시와 그림과 음악을 통해 우리 인간들의 행복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진다.
이종분 시인의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서정시의 진수이자 우리 인간들의 행복의 밑그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엄마 쌈닭 맞지요
독하긴 했지 그러니까 네 애비하고 살았다 이놈아
- 「쌈닭」 전문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이 세상은 싸움의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싸움은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살아가는 방법이며, 모든 교육은 이 싸움의 기술을 익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싸움이 있고, 아내와 남편 사이에도 싸움이 있다. 친구과 친구 사이에도 싸움이 있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싸움이 있다. 적과 적 사이에도 싸움이 있고, 희극과 비극 속에도 싸움이 있다. 미녀와 야수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미녀들은 싸움꾼을 좋아한다. 모든 미녀들도 싸움을 좋아하고, 그들은 힘이 약한 만큼, 사내 중의 사내인 야수를 선택함으로써 이 세상을 지배하고자 한다.
모든 영화와 소설, 모든 노래와 춤도 그 주제는 싸움이며, 이 싸움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세계와 타인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나는 명령하는 사람이고, 너희들은 복종해야 한다.”
“엄마 쌈닭 맞지요// 독하긴 했지// 그러니까 네 애비하고 살았다/ 이놈아!”
참으로 백전백승의 여장부다운 사람이 이 「쌈닭」의 주인공인 이종분 시인인 것이다.
독해야 한다. 이 ‘사즉생의 각오’가 임전무퇴의 정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