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하지 않은 불교 공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까?
불교 신자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불교에 관심이 있느냐의 여부를 떠나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 익숙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사찰의 분위기, 스님의 모습, 부처님 오신 날의 거리 풍경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또 ‘무상(無常)’이나 ‘공(空)’과 같은 불교 용어들을 낯설지 않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종종 입에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불교에 대한 익숙함과는 별개로 불교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불교’라는 범주 안에 너무도 다양한 가르침이 있고, 심지어 그중에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가르침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불교 공부는 출발점을 찾기 어려운 공부일 뿐만 아니라. 간신히 출발점을 찾은 다음에도 혼란스러운 여정을 감당해야 하는 공부이다. 그래서 불교는 만만해 보일 수 있지만 불교 공부는 만만하지 않다.
불교 공부는 어디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어떤 이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불교야말로 불교의 근본이니 그것부터 공부하라고 이야기한다. 일리 있는 의견이지만 여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불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초기불교부터 공부한다면 아무래도 초기불교에 기울어진 관점을 갖게 되기 쉽고, 그러면 ‘불교’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다양한 가르침을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상(無常), 공(空)이 불교의 전부가 아니다!
열린 태도로 불교를 공부할 때 알게 되는 것들
불교는 2,500년에 걸친 오랜 세월 동안 아시아의 넓은 지역을 무대로 하여 성장하고 발전해 온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이다. 따라서 불교는 초기불교 혹은 대승불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불교 학파의 가르침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불교라는 장구한 드라마는 석가모니의 기본적 가르침들을 보다 논리적이고 정합성 있는 체계로 재구성하기 위한 노력을 씨실로, 그 기본적 가르침들을 고통스러운 중생의 삶과 결합시키기 위한 고민을 날실로 하여 촘촘히 짜여 있다. 불교란 단순히 ‘무상’이나 ‘공’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이러한 노력과 고민을 포함하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당하고자 했던 굳은 의지와 꺼지지 않는 생명력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바람직한 출발점은 ‘불교’라는 범주로 포괄되는 여러 가르침이 석가모니 이래로 어떤 배경과 문제의식에서 어떻게 흥기하고 발전하고 쇠퇴해 갔는지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일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문자로 전해지는 가르침만으로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역사를 추동한 노력과 고민, 의지와 생명력에 비추어 고찰될 때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 공부라는 기나긴 여정을 불교철학의 역사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여정에서 만나게 될 여러 가지 생경한 ‘불교’들에 대해 진지하고도 편견 없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개방적인 태도에 입각한 불교 공부는 불교로부터 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궁극적으로 삶을 보다 지혜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광대한 사유의 지평이 열리다
불교철학사의 최절정기를 다룬 책!
「인도 불교 철학」은 이런 이유에서 주목해야 할 책이다. 원서의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인도’ 불교철학의 ‘황금시대’, 즉 석가모니가 남긴 가르침을 정리한 아비달마 텍스트들의 집필이 이루어진 시기(서력 기원 초기 무렵)부터 인명학의 거장인 다르마끼르띠가 활동하던 시기(서기 6~7세기)까지 인도라는 시공간을 무대로 활동한 주요 불교 학파의 사상을 차례로 살펴본다. 물론 불교 전체의 무대가 되는 시공간은 이 책에서 다루는 제한된 시공간보다 훨씬 더 광대하다. 하지만 그 광대한 시공간에서 명멸했던 복잡다양한 불교철학들도 결국에는 이 책에서 다루는 제한된 시공간에서 활동했던 몇몇 불교 학파들의 가르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책은 불교의 모든 시공간을 빠짐없이 다루지는 않지만 ‘인도 불교철학의 황금시대’에 집중함으로써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고자 한다.
「인도 불교 철학」은 불교철학의 역사에 대한 책으로서 아비달마ㆍ중관학파ㆍ유가행파ㆍ인명학파의 가르침 가운데 중요한 사유를 선별하여 충실하게 소개한다. 1장 ‘아비달마’에서는 아비달마 전통의 성립 배경이 되는 논모(論母, mātṛkā)에 대해서 살펴보고, 설일체유부와 경량부 등 주요 부파의 특징적인 사유들을 차례차례 다룬다. 2장 ‘대승’에서는 대승불교의 기원, 반야 사상, 용수의 철학을 주로 다룬 다음, 불호ㆍ청변ㆍ월칭ㆍ적호ㆍ연화계 등 용수의 뒤를 이어 중관학파의 맥을 이은 주요 학자의 사상까지 살펴본다. 3장 ‘유가행파’에서는 유가행파의 발전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살펴본 후, 찰나멸론ㆍ유심론ㆍ알라야식론ㆍ삼성설ㆍ자증설 등 유가행파의 근간을 이루는 사유들을 설명한다. 4장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 학파’에서는 이들이 전개한 인식론과 논리학의 개요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의 학파 귀속 문제와 같은 흥미로운 주제까지 아울러 다룬다.
충실한 원전 번역, 최신 연구 성과 반영
전문가와 일반 독자를 모두 만족시키는 완성도 높은 책
「인도 불교 철학」은 여러 사유를 설명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지 않음에도 본격적인 개론서보다도 이를 더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여느 개론서처럼 각기 다른 불교 학파에 귀속되는 여러 사유를 그 자체의 논리에 입각하여 평면적으로 소개하는 전략을 취하지 않는다. 대신 불교철학사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각각의 사유들이 가진 문제의식과 그 의식적 지향들을 고스란히 살려냄으로써 보다 입체적으로 그것들을 설명한다. 이러한 전략 덕분에 이 책은 불교철학서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개론서로서의 역할까지 충실하게 수행한다. 이 책은 인도 불교 주요 학파들의 사유를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불교의 여러 논점을 대하는 모범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불교철학과 여타 인도철학과의 관계, 대승과 중관ㆍ유식의 관계, 대승비불설, 불교의 비과학적ㆍ비역사적 측면, 세친이나 다르마끼르띠 등 여러 논사의 학파 귀속 문제 등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사려 깊고도 인상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인도 불교 철학」의 또 다른 미덕은 학술서를 연상시키는 학문적 접근 방식이다. 이 책은 2차 문헌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1차 문헌에 대한 분석에도 크게 의지하고 있다. 저자는 산스크리트나 티베트어로 된 여러 원전 텍스트를 풍부하게 인용하며, 인용한 구절의 원문을 각주를 통해 성실하게 제시한다. 이에 더해 역자는 저자가 인용한 원전 텍스트 구절에 대한 한역(漢譯) 구절까지 꼼꼼하게 찾아서 추가적으로 제시한다. 서구 불교학계의 최근 연구 성과들을 널리 참조하고 있다는 점 또한 이 책의 장점이다. 그 결과 이 책은 여러 주제 분야에 걸쳐 신선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해당 분야의 근래 연구 동향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까지 그려 준다. 27페이지에 달하는 참고문헌 목록 역시 인도 불교 각 분야에 대한 고전적 연구뿐만 아니라 주목할 만한 최근 연구들까지 널리 아우르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불교에 관심 있는 진지한 일반 독자들뿐만 아니라 불교 연구자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