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새 의미로 재구성된 실학
19세기 중후반 서양의 압도적인 학문과 기술을 경험한 동양의 지식인들은 서양 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여러 논거를 고민하였다. 많은 이들이 유학의 실용ㆍ경세經적 측면에 주목하고 이에 공명하는 서양의 학문ㆍ기술을 수용하자고 했다. 한편에서는 서양의 과학ㆍ실용주의야말로 실학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동양에서 오랫동안 존재했던 실용’을 실학으로 재조명하며 서양문물에 대응하는 흐름이었고, 한국ㆍ중국ㆍ일본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또 실학 말고도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 개물성무開物成務, 경세經世와 치용致用 등도 새삼 조명받았고 이들 용어들도 실학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었다. 한국은 20세기 전반기에 한 발 더 나갔다. 일제강점기에 최남선, 정인보를 필두로 김태준, 안재홍, 문일평 등은 조선 후기 경세학자들의 학문을 실학으로 정리하고, 실학은 근대에 접맥한 학문이었다고 평가했다. 해방 후에는 남북한 모두 건설에 매진했고 이를 정당화하는 역사 전통을 강조했다. 실학은 우리 역사 안에서 개혁, 진보, 근대성의 상징하는 개념이 되었고, 교육을 통해 국민 상식이 되었다. 실학과 근대의 만남은 동아시아 3국의 공통된 특징이었고, 실학과 실학자를 특정한 역사 패러다임으로 구성하여 우리 역사의 내재적 발전으로까지 증빙한 것은 한국의 특징이었다.
인물이 아닌 용어를 통한 접근
이 책은 ‘실학’이란 용어를 통해 실학의 역사를 구성했다. 실實이 지닌 보편과 고유의 의미를 먼저 묻고 그에 기반해서 실학이 오래 지속하였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의미를 갈아탔음을 정리하였다. 책의 구성은 실과 실학의 의미,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실학을 언급한 사람들, 근대 이후 실학에서 새로운 의미의 전개, 해방 후 한국에서 실학의 사용, 그리고 21세기 이후 실학의 전망 등이다. 조선후기 실학자를 전제하고 그의 학문을 설명하는 통념적인 실학에 대한 설명은 이 책에서 제한적으로 다루어질 뿐이다. 쉽게 말해 이 책의 주인공은 실학자와 그의 학문이 아니라 실학이란 용어와 개념 그리고 실학을 말한 사람들이다. 때문에 위에서 소개한 역사적 전개가 기본 얼개이고, 기존 설명에서 포착되지 않았던 흥미로운 장면들이 캐내어졌다. 실학과 관련한 대표적인 표어 이용후생, 실사구시 등이 언제 어떻게 실학과 관련되었는지, 지금은 사라진 조선시대의 실학 논쟁과 실학 관련 용어들, 한중일이 근대에 실학을 어떻게 재구성했는지, 현대 한국에서 실학이 풍미하는 와중에 빚어진 오용의 장면, 21세기 지역에서 소비하는 실학의 모습 등등이다. 방법론에서도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실학이 등장하는 다수의 문헌에서 실학과 관련한 용어들 이른바 공기어共起語를 매 시기마다 분석하여 의미의 지형과 거시적인 추이를 개괄하였다.
실학 논쟁과 실학의 미래
실학은 현대 한국 역사학계의 대표 논쟁 중의 하나이다. 실학이란 개념을 전제하고 개혁ㆍ실용적이었던 학자들의 주장을 실학으로 정리하는 입장과, 실학을 현대의 구성물로 보고 실학은 유학이라던가 아니면 실학의 역사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입장 사이의 논쟁은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 책은 실학의 시대적 맥락을 따지면서 그 주장들을 통합하고 있다. 실학의 실재 발화發話와 역사적 변천에 대한 고찰을 통해, 실학의 존재를 증빙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역사용어 실학이 전가의 보도가 아니라는 점을, 실학의 허구를 말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실학은 장구한 내력의 용어로 의미가 변천해왔음을 상기시킨다. 시대의 표어처럼 작용하며 사회를 이끈 개념들은 오랜 역사 경험을 갖고 있으며 새로운 의미로 내용을 갱신하며 지속한다. 실학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저자는 이를 긍정하면 오랜 논쟁을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 이후에 실학이 새로운 의미와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20세기 ‘우리 안의 근대’를 상징했던 실학이 21세기에 신新실학으로 탈바꿈할 가능성은 오랜 변화의 역사를 긍정할 때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