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언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시적 은유와 어우러지는 감동
----시인 유창섭 (전 월간 모던포엠 편집주간)
1. 시인이 선택한 은유적 언어의 시적 발현
이대전 시인의 시는 풍부한 표현과 상징적 언어로 채집된 언어의 그물로 직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때로는 김현승 시인(1913-1975)과 같은 엄숙 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아마도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공통점 속에서 발견될 것 같은 진지함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소 생뚱맞은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가끔 시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소설 우편배달부에서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1904-1973)는 우편배달부 마리오가 “시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시는 메타포 metaphor(=은유)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 삶은 수많은 메타포 metaphor(=은유)로 가득 차 있다.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그걸 알아채고 살아가도록 깨닫게 해 준 시인을 만난다.
당시 대 시인 네루다를 만난 것은 마리오에게는 행운이었다. 마리오의 인생은 네루다 같은 존재를 우연히 만나 시적 영감을 받고, 사랑을 찾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시가 일련의 메타포 metaphor(=은유)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대전 시인의 경우처럼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채집하기 위해서는 그 시인의 언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시적 은유를 이해하여야 그 정서적 함의를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서적 감동과 그에 걸맞은 시적 울림이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이대전 시인의 시적 언어가 진지함과 진솔한 시적 태도에서 발원하는 시적 영감의 힘이 이 시인의 시를 감동으로 이끌고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인의 시 속에서는 시인이 가진 사고의 다양한 시적 프리즘이 시적 의미망에 투영되고 있다.
인간의 영원한 명제인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시, “그대에게 묻네요 “ “입춘방” “어머니의 천수답”과 같은 작품---가 은유되는가 하면, 사물의 상징성을 통한 ‘사회문화적 시적 자아의 성찰과 시적 정서‘가 투사---시, “몽당연필” “외로움의 얼굴” “늙어가는 포구”과 같은 작품---되기도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 인간적 연민과 삶에 대한 염려’---시, “세월의 강” “뛰어다니는 세상” 과 같은 작품---가 드러나기도 하며,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경외와 신앙에 대한 깨달음‘---시, ”입추“ ”저녁 식탁“ ”붉은 여행길“같은 작품---을 드러내어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시인의 심상적 작용은 여러 층위의 넓은 스펙트럼을 드러내어 정서적 새로움을 발현시키기도 한다.
이제 이대전 시인의 제2시집의 내면으로 들어가 시인의 세계를 탐색해 보기로 한다.
1.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
이대전 시인의 시 중에서도 자주 만나게 되는 친숙한 정서는 그리움에 대한 시인의 풍부한 감성이다.
허리띠를 풀지 못하나요
덧난 상처들을 훈장처럼 드러내고
새벽길 걸으며 푸나무들의 기지개에서 어떤 암시를 읽었는지요
서서히 식어가는 체온
찬바람에 허기는 더해 가는데
밤낮의 명암을 허무는 일상을 추스르지 못해
나무들이 폭설에 부러진 조붓한 산길을 걸어보긴 했나요
햇살을 비껴가는 산그늘을 품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숲길에서
마른하늘에 번개라도 만나 보았나요
마침표 없는 생의 외길은 끝이 없는데
생각은 와류의 잠겨 허덕이기 일쑤였지요
지금은 어디쯤에 서 계신가요
그대 혈관을 타고 부풀어 오르던 통증은, 오늘
결 고운 빛의 소리로 바뀌었겠지요
물음은 끝없는데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세상, 봄이 왔는데
봄 같지 않은 행간에 갇혀 더운 숨결만 내뱉고 있답니다
(시, “그대, 끝없는 물음 “ 전문)
“그대, 끝없는 물음”에서 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대”는 매우 상징적인 존재다. 그저 무작정 마음속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은 ‘아무 이야기나 일방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로 읽힌다. 그것은 어쩌면 한용운 시인이 “님의 침묵”에서 말하는 거대담론의 대상처럼 이 시에서도 이대전 시인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신앙의 대상이나 또 다른 자신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밤낮의 명암을 허무는 일상을 추스르지 못해
나무들이 폭설에 부러진 조붓한 산길을 걸어보긴 했나요
햇살을 비껴가는 산그늘을 품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숲길에서
마른하늘에 번개라도 만나 보았나요
(시, “그대, 끝없는 물음”의 부분)
시인이 말하는 일상의 작은 풍경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감성적 자아와의 소통이며 그 실체를 기억하여 하나의 의미망에 가두어둔 안타까움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나무들이 폭설에 부러진 조붓한 산길’은 자신의 경험 속의 풍경이며, ‘마른하늘에 번개라도 만나 보았나요’에서처럼 역시 자신만의 내면적 대상에게 물어보는 은유적 대상의 풍경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어딘가에 축적되어 있다가 시인이 앓고 있는 인간적 통증을 항상 버팀목이 되어 시인을 견디게 해 준 분인 “그대 혈관을 타고 부풀어 오르던 통증”으로 동일화하여 드러내고 있다고 읽힌다.
그래서 시인은 상대에게 “봄이 왔는데 / 봄 같지 않은 행간에 갇혀 더운 숨결만 내뱉고 있답니다 ”라고 푸념처럼 말을 던져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대전 시인은 자신의 관점을 보다 확장된 세계로 끌고 가면서 다양한 정서적 교감을 시도하고 있다.
다음에 읽게 되는 “입춘방立春榜”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부풀어 오른 ‘그리움의 정서’를 그려낸다
숭숭 구멍 뚫린 배경
찬바람이 펼쳐놓은 그물에 얽혔다
비 새는 지붕에선 새들이 이끼를 쪼고
마룻바닥은 눅눅했다
겉옷 걸치지 못한 날,
재채기는 마른 목구멍에 걸리고
긴 한숨으로 연탄불을 지피고 있는 너는
끝 모르는 기다림을 삭힌다
세월은 한참 늙었는데
잎맥 앙상한 낙엽 하나 주워 들고
그물에서 빠져나가던 햇살을 들여다보면
지나간 시간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눈물로 쓴 입춘방
녹슨 네 집 대문에 붙여두고
한참을 서있다 왔다
거실은 커튼이 닫혀 있었고 너는 모른다
입춘방,
겨울을 앓는 세상의 문 밖을 향해
일 년 내내 붙어 있을 희망의 기도문
(시, “입춘방” 전문)
시 속에서 시인은 “입춘방”에 붙어 있는 자신의 의도를 표출한다.
입춘방,
겨울을 앓는 세상의 문 밖을 향해
일 년 내내 붙어 있을 희망의 기도문
시인의 마음속에 사는 다른 사람이 있다. 그저 막연히 그리움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어떤 안타까운 이미지를 가진 “너”가 존재한다. 그는 그를 통해 삶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현재와 격리된 그리움으로 자신에 대한 연민을 토로하기도 한다.
봄이 왔는데, 그는 마음속에서 그 기억 속 “너”를 위해 “입춘방”을 쓰고 그가 살던 녹슨 철대문에 그 ‘입춘방’을 붙여준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세월은 한참 늙었는데” 지나간 세월의 기억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순간을 추상한다.
잎맥 앙상한 낙엽 하나 주워 들고
그물에서 빠져나가던 햇살을 들여다보면
지나간 시간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중략-----
겨울을 앓는 세상의 문 밖을 향해
일 년 내내 붙어 있을 희망의 기도문
(시, “입춘방“의 부분)
“잎맥의 그물에서 빠져나가던 햇살“이란 많은 세월을 뚫고 지나온 기억의 잔상이 아닐까?
그래서 시인의 마음에서는 “너”를 위해 그 차가운 겨울을 지나온 집 대문에 붙어 있는 입춘방은 “일 년 내내 붙어 있을 희망의 부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아름다운 기억의 행간에 담겨있는 소중하고 진지한 안타까움으로 존재하여 독자에게 감동을 안겨주게 되는 것이다.
이대전 시인의 시 중에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자식을 길러내는 어려움을 감당해온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고마움으로 각인되어 있다.
뿌리 걸지 못한 어린 벼,
시뻘건 몸을 비비 꼬지만 비 소식 멀다
하늘과 맞닿은 천수답
논둑엔 이따금 작은 새들이 날아들어 마른 풀뿌리를 쪼다 간다
여명이 움터는 하루를 살피며
땀띠 덧난 목 길게 늘여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머니
타는 가슴속엔 언제나 나를 품고 있었다
눈가에 잡힌 주름
외마디 신음소리는 하늘을 흔들었고
날마다 바뀌어 뜨는 빛 다른 구름을 보며 마음을 추슬렀다
깊게 파인 내 생의 발자국에 고인 빗물 쉽게 마르고
산기슭 짙은 그늘조차 흐릿한 지 오래
후회와 자책이 가시넝쿨처럼 얽혀 있다
엊저녁 잠결에 들려오던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
나를 찾아오시다가 길을 잃으셨나 보다
아침노을이 번지는 창가
어슴푸레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
이 기억 사라지기 전 다시 길을 낼 수 있을까
언제나 어머니를 하늘바라기 하는 나는
모정의 비를 기다리는 천수답
(시, “천수답”전문)
시인의 어머니는 홀로 자식들을 키우면서 힘든 산비탈 천수답을 일구며 삶을 이끌고 생활하시었다. 그런 와중에도 유난히 어머니는 시인을 데리고 다니면서 아들을 뒷바라지하며 미래를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하늘과 맞닿은 천수답
논둑엔 이따금 작은 새들이 날아들어 마른 풀뿌리를 쪼다 간다
여명이 움터는 하루를 살피며
땀띠 덧난 목 길게 늘여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머니
타는 가슴속엔 언제나 나를 품고 있었다
----중략----
엊저녁 잠결에 들려오던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
나를 찾아오시다가 길을 잃으셨나 보다
----중략----
언제나 어머니를 하늘바라기 하는 나는
모정의 비를 기다리는 천수답
(시, “어머니의 천수답”부분)
꿈결에도 아들을 찾아오시다가 길을 잃으셨는지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어머니에게 시인은 언제나 천수답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같다. 참으로 애틋한 기억이 아닐 수 없다.
2. ‘사회문화적 시적 자아의 성찰과 시적 정서‘
문경새재 조령 3 관문
낙동강 발원지 세 곳 중의 하나
말갛게 흐르던 여울
은밀한 속뜻 감춘 유장한 흐름이 도도하다
생명의 원력原力은 수많은 실개천과 몸을 섞어
이념의 올무를 끊어내며 사자후를 토한다
두 번 다시 좌절은 없다는 생각
긴장과 안도가 혼재한 채 흘러가는
지난한 세월의 혼魂이 수시로 요동친다
세월의 강, 기수지의 바다는 저만치 먼데
나의 생은 달과 별을 담을 수 없는 겨울 강
되돌아갈 자리는 없고
시간의 비늘을 더듬는 기억은 지울 수 없어
남은 생애, 반목의 그물에 포획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시, “세월의 강” 전문)
이제 노년의 삶을 살게 되는 이 시인의 마음엔 살아온 세월에 대한 많은 생각이 매달려 있다. 수많은 실개천이 모여 강이 되어 바다를 향해 흐르게 되는 강물의 흐름이나 인생의 흐름이나 무엇이 다르랴.
말갛게 흐르던 여울
은밀한 속뜻 감춘 유장한 흐름이 도도하다
----중략----
생명의 원력原力은 수많은 실개천과 몸을 섞어
이념의 올무를 끊어내며 사자후를 토한다
두 번 다시 좌절은 없다는 생각
----중략----
세월의 강, 기수지의 바다는 저만치 먼데
----중략----
남은 생애, 반목의 그물에 포획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시, “세월의 강“ 부분)
그 강이 되어 흐르는 시인도, 감상자인 우리도 언젠가는 도도한 바다에 이르러 살아온 인생을 성찰하고 돌아보는 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때때로 살다 보면 우리는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일까? 하고 회의하는 마음이 되는 때가 있다.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면 당연시했던 일들도 꼭 그렇게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 않는 때가 종종 존재한다.
희뿌연 황사, 시계視界를 가린 날
예닐곱 살 사내아이, 키보다 큰 가방을 메고 뛰어간다
애야, 어딜 그리 바삐 가니? 학원가요 아니 학교는 갔다 왔고? 그럼요 결석하면 엄마랑 선생님한테 야단맞거든요
짐짓 귀찮은 듯 뒤뚱거리며 뛰어간다
학원버스가 후문에 오거든요 늦으면 기사 아저씨가 혼낸다니까요
뒤돌아보는 억양이 까칠하다 짐짝처럼 무거운 가방, 귀퉁이에 목을 맨 하얀 강아지 인형이 몸부림을 친다
가엾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부모 잘 만난 듯싶기도 하고
앙탈 부리지 않고 학교도 학원도 잘 다니는 걸 보면 착하다 싶다
경쟁의 시대
뛰어가는 저 아이
부모도
선생도
버스기사도
너도 나도 밤낮없이 뛰고 있다
세상은 온통 뛰어다니는 소리로 시끄럽다
그 사이,
세상 어느 한쪽이 무너지고 있다
(시, “뛰어다니는 세상” 전문)
젊은 시절에는 그런 마음도 사치라고 접어 두었던 생각, 뛰어가는 아이를 보는 시인의 눈은 서두르는 세상에 대한 연민에 꽂혀있다.
뒤돌아보는 억양이 까칠하다 짐짝처럼 무거운 가방, 귀퉁이에 목을 맨 하얀 강아지 인형이 몸부림을 친다
-----중략----
너도 나도 밤낮없이 뛰고 있다
세상은 온통 뛰어다니는 소리로 시끄럽다
그 사이,
세상 어느 한쪽이 무너지고 있다
(시, “뛰어다니는 세상“의 부분)
시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고 은유하여 독자들이 교감할 상상력의 공간을 만들어 두어야 제격이다. 그래야 시인의 눈만이 아닌 독자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들여다보게 되며 많은 것을 상상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모습을 은유하는 형태로 그려낸다.
“ 온통 뛰어다니는 소리로 시끄러운 세상을 되돌아보며 “가방, 귀퉁이에 목을 맨 하얀 강아지 인형이 몸부림을” 치는 세상의 모습으로 치환되는 세상의 “세상 어느 한쪽이 무너지고 있다”는 시인의 인식은 많은 이야기를 은유한다.
존재하는 많은 세상살이를 살펴보면 이 세상은 언제나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다음에 만나는 시--“긋다”는 존재적인 의미에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시 중의 하나다.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유성
하지만 여운은 길다
세상 구석구석 그을 수 있는 여백은 많으나
획 하나를 긋기란 쉽지 않다
긋는다는 것
존재의 의미를 넘어 선 존재 이상의 문제다
후미진 골목 돌담장을 한사코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이나
벽에 기대어 키를 키우는 장미덩굴이 붉은 꽃 피우는 일이나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광장을 메운 투쟁의 아우성도
그들의 세계 속에 획 하나 그으려는 것 아닐까
끝과 끝이 필연이 부딪히는 날
획 속의 사람들은 안녕할 수 있을까
긴 꼬리를 문 별똥별
생의 정점, 그 획을 긋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난을 지고 가는 십자가의 길, 때를 기다린 후의 일이다
(시, “긋다” 전문)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주 다양한 삶의 형상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 존재의 세상에서 자신이 살았다는 한 획을 “긋는” 일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아무렇게나 긋는 일이 아니라는 잠언과도 같은 언술로 그 의미를 일깨우고 있다.
긋는다는 것
존재의 의미를 넘어 선 존재 이상의 문제다
후미진 골목 돌담장을 한사코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이나
벽에 기대어 키를 키우는 장미덩굴이 붉은 꽃 피우는 일이나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광장을 메운 투쟁의 아우성도
그들의 세계 속에 획 하나 그으려는 것 아닐까
----중략----
긴 꼬리를 문 별똥별
생의 정점, 그 획을 긋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난을 지고 가는 십자가의 길, 때를 기다린 후의 일이다
(시, “긋다” 부분)
이대전 시인은 ‘획을 긋는 일’은 존재를 넘어 존재 이상의 의미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이 세상에서 어떤 흔적 같은 것이라도 남겨 놓는다는 것은 존재 이상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돌담장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이나 ”키를 키운 장미 넝쿨“에서 빨간 꽃을 피우는 일도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광장을 메운 투쟁의 아우성“을 지르는 것도 모두 획을 그으려는 몸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고난을 지고 가는 십자가의 길, 때를 기다린 후의 일이다”라고 말하여 그 깊은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3. ’ 인간적 연민과 삶에 대한 염려’
시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서정주의적인 심상을 만나게 된다.
이 시인이 살아온 시대의 세월에서는 빠질 수 없는 기억의 그림자--몽당연필--이 아주 중요한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데려다준다.
미지의 터널을 들어서는 설렘
한때는 출구를 찾는 눈동자가 빛났었지
야무진 꿈의 속살을 더듬으며 들녘을 지나
바다를 건너는 바람의 질주를 하얀 종이에
그리던 너, 거침이 없었지
책장을 정리하다 발견한 몽당연필 한 자루
먼지 쌓인 책갈피 속에 잠자던 생각들이 눈을 뜬다
접혀있던 기억이 기지개를 켜자 동심의 맥박이 뛴다
키 큰 연필이 닳을 때마다 꿈은 더욱 키가 자랐지
말없이 지켜보시던 부모님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까
이제야 그 마음을 찾아내고 힘주어 쥐어보지만
늙어 온 세월 어느 굽이에서 그 꿈, 멈추었던가
백지 위에서 길을 잃은 몽당연필
창틈으로 찾아든 별, 구부정한 꿈의 그림자를 깨우고
생의 마지막 터널에서 울리는 기적소리와 함께 손에 잡힌
몽당연필 속삭이는 소리에 참회의 귀를 세운다
(시, “몽당연필“ 전문)
지금 생각해 보면 “몽당연필”이란 어린 시절의 중요한 매개체였다. 쓸 종이조차 풍부하지 못했던 시절엔 연필 한 자루조차 몽당연필이 되도록 써야 하는 시대적 곤궁을 떠안고 살아야 하는 시대였음을 이 시대의 컴퓨터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겐 먼 나라의 전설처럼 느껴질 만한 일이 될 수도 있겠다.
바다를 건너는 바람의 질주를 하얀 종이에
그리던 너, 거침이 없었지
책장을 정리하다 발견한 몽당연필 한 자루
먼지 쌓인 책갈피 속에 잠자던 생각들이 눈을 뜬다
접혀있던 기억이 기지개를 켜자 동심의 맥박이 뛴다
----중략----
늙어 온 세월 어느 굽이에서 그 꿈, 멈추었던가
백지 위에서 길을 잃은 몽당연필
----중략----
창틈으로 찾아든 별, 구부정한 꿈의 그림자를 깨우고
생의 마지막 터널에서 울리는 기적소리와 함께 손에 잡힌
몽당연필 속삭이는 소리에 참회의 귀를 세운다
(시, “몽당연필“ 부분)
시인은 “책장을 정리하다 발견한 몽당연필 한 자루”를 두고 오랜 옛날의 동화 같은 기억을 이끌어낸다.
“키 큰 연필이 닳을 때마다 / 꿈은 더욱 키가 자”라던 “몽당연필” 속에서 꿈을 꾸던 시인의 꿈은 어디서 멈추었던 것일까? 아니, 얼마간 그 꿈을 이루고 이제 그 아련한 추억을 떠 올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작은 키의 몽당연필에서 아직도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그래서 지금도 시인은 소곤거리는 몽당연필의 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꿈을 찾아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시인의 다른 얼굴, 외로움을 살펴본다.
시인의 마음속에는 “둥근 의자“ 하나가 있는 모양이다.
그 둥근 의자에는 많은 그리움이 함께 앉아 있다. 그런 그리움은 어떤 때는 하나의 외로움으로 존재한다.
마음속 둥근 의자
그 의자에 너를 앉혀 놓으면
상념 밖으로 밀려 나오는 새벽 바다
눅진 해무가 무딘 가슴을 녹인다
닫을 수없는 마음에 화르르 번져가는 지독한 그리움
현기(眩氣)를 앓던 어느 날의 기억 속으로 잠기면
외로움의 벽에 아로새긴 견고한 그림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하늘을 끌어내리던 유성의 시간 속에서 여명이 움터고
지평선을 가늠하는 수평선의 미로는 점점 밝아 온다
너는 모른다 아니
알고도 남을게다
그리움의 낮, 빛은 어둠의 동반자라는 것을
(시, “외로움의 얼굴” 전문)
시인은 가끔 자신의 내면에서 외로움을 발견한다.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그런 속에서도 상념 밖으로 밀려 나오는 새벽 바다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마음속 둥근 의자
그 의자에 너를 앉혀 놓으면
상념 밖으로 밀려 나오는 새벽 바다
눅진 해무가 무딘 가슴을 녹인다
----중략----
외로움의 벽에 아로새긴 견고한 그림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중략----
그리움의 낮, 빛은 어둠의 동반자라는 것을
(시, “외로움의 얼굴” 부분)
“외로움”이란 오직 어둠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의 뒤편에서 가끔 빛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시인의 고향엔 바다가 있고 바다에 얽힌 추억들이 언제나 아름다운 시적 존재로 등장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은 단순하고 평범한 모습이 아니라 바다의 삶을 짊어지고 사는 주체로서 ‘바다를 등에 지고 오는 여자’라고 상징하여 그 감흥을 배가시킨다.
바다를 지고 오는 여자
거친 파도의 무늬를 몸에 새기고
태풍 경보에 피항한 뱃사람들의 포구가 된다
밀려드는 배, 떼 지어 갑판 위를 나는 갈매기만 분주하다
안도하는 얼굴들이 차가운 공기를 데우는 선술집
소금기 묻어 나는 목소리로 허탕 친 바닷길을 토해놓으며
어둑하게 가라앉은 바다의 잔광에 눈길을 멈춘다
생의 경험은 예지叡智,
태풍이 물러갈 시기를 아는 여자는
수평선으로부터 오는 빛의 빛의 산란을 타고
꼬리 흔드는 깃발에 시선을 멈춘다
바다를 읽어 풍요를 계산하는 건 숙달된 지혜
바다를 안고 들어온 여자
다시 바다로 떠날 사람들의 이야기에 흥을 돋운다
왁자지껄한 소리 뒤로 저녁이 내리고
늙어가는 포구의 시간이 저문다
(시, “늙어가는 포구” 전문)
작은 포구에 있는 어촌에서는 높은 파도나 폭풍으로 인해 고기를 잡으러 출항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바다를 지고 오는 여자
거친 파도의 무늬를 몸에 새기고
태풍 경보에 피항한 뱃사람들의 포구가 된다
----중략----
소금기 묻어 나는 목소리로 허탕 친 바닷길을 토해놓으며
어둑하게 가라앉은 바다의 잔광에 눈길을 멈춘다
----중략----
태풍이 잦아 들 시기를 아는 여자는
----중략----
바다를 읽어
----중략----
바다를 안고 들어온 여자
다시 바다로 떠날 사람들의 이야기에 흥을 돋운다
----중략----
늙어가는 포구의 시간이 저문다
(시, “늙어가는 포구” 부분)
바다에 나가지 못하는 날이나 파도가 심해 피항하는 어선이 많은 날에는 선술집에 모여 ‘다시 바다로 떠날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에 흥을 돋우며 농담도 하고 잡담도 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 속에서 바다를 입고 사는 여자, 그리고 어부들의 삶이 녹아내리고 바다도 나이를 먹으며 그들과 함께 늙어가는 모습을 정감 있게 서정적으로 그려 놓았다.
4. ‘사물에 대한 경외와 신앙에 대한 깨달음‘
폭양을 뒤집어쓰고 찬란했던 푸름
가라앉는 제 그림자 위로
막바지 여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
잠깐 당신이 잠든 틈 사이로
단풍으로 갈아입고 뒤꿈치 들어 사뿐히 온다
붉은 숲 속 길은
뾰쪽한 햇살에 꼬불꼬불 일어서는데
아스라한 추억을 안고 간 그대, 저 길로 다시 돌아오는데
어쩌자고 나는 주저하고만 있는가
슬픔과 기쁨의 무게를 계량하며
슬그머니 겉옷을 갈아입는 산기슭,
아직은 이른 가을
너럭바위에 따사로운 가을볕이 눕고 있다
(시, “입추” 전문)
가을을 지나가는 시인의 마음이 성글게, 혹은 쓸쓸하게 드러난 시이다.
마치 지금은 곁에 없는 그리운 사람처럼 계절이 단풍으로 갈아입고 시인을 찾아오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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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당신이 잠든 틈 사이로
단풍으로 갈아입고 뒤꿈치 들어 사뿐히 온다
붉은 숲 속 길은
뾰쪽한 햇살에 꼬불꼬불 일어서는데
아스라한 추억을 안고 간 그대, 저 길로 다시 돌아오는데
----중략----
아직은 이른 가을
너럭바위에 따사로운 가을볕이 눕고 있다
(시, “입추” 부분)
이제 모두 비워야 하는 계절을 앞에 두고 단풍 든 잎새들이 떨어지면 숲을 이루던 숲길도 꼬불꼬불 시인 앞으로 일어서게 된다는 사실을 서경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아직은 이른 가을 / 너럭바위 위로 따사로운 가을볕이 눕고 있다”는 표현 속에서 다른 계절로 이동하는 “입추”를 잘 형상화시키고 있다.
이제 시인의 소박한 저녁 식탁이 감성적으로 잘 그려진 “저녁 식탁”을 읽어 본다.
식탁 위에 넘실대는 바다가 한 상이다
비린 아우성이 식탁에 차려지고
창으로 드는 햇살에 자취를 감추는 바다의 풍요
억센 생선가시들이 접시에 수북하다
대책 없는 생각의 줄기가 꺾이고
눈길 머무는 삽짝,
봄꽃은 세월을 비껴갔다
어둠살에 물든 감나무 이파리에
달빛을 찍어 맹서해 두었던 다짐들
허기진 가난이 욕망의 다짐들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삶이란 개념은 질서 정연한 것인가
과정의 색깔들은 과연 순수하기만 한 것일까
저녁, 저문 식탁 위로 욕망의 가시들을 내려놓는다
(시, “저녁 식탁” 전문)
저녁 식탁에 차려진 바다의 생선들이 즐비한 식탁의 모습이 풍성하게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생선들 틈으로 바다가 파도를 몰고 오고 험한 파도를 헤치고 잡아온 생선들의 퍼덕임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
뛰어난 표현 감각과 정서적 상상력이 매우 인상적인 시이다.
식탁 위에 넘실대는 바다가 한 상이다
비린 아우성이 식탁에 차려지고
창으로 드는 햇살에 자취를 감추는 바다의 풍요
억센 생선가시들이 접시에 수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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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머무는 삽짝,
봄꽃은 세월을 비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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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개념은 질서 정연한 것인가
과정의 색깔들은 과연 순수하기만 한 것일까
저녁, 저문 식탁 위로 욕망의 가시들을 내려놓는다
(시, “저녁 식탁” 부분)
“억센 생선가시들이 접시에 수북하다 “는 말은 그만큼 험난한 바다에서의 고기잡이를 거쳐서 우리의 식탁에 올려진 노고를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대책 없는 생각의 줄기가 꺾이고 / 눈길 머무는 삽짝, / 봄꽃은 세월을 비껴갔다”는 이야기 역시 계절도 모르고 출항하여 돌아오곤 하는 삶의 곤고한 세월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저녁 식탁은 단순한 식사를 하는 식탁이 아닌 삶의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암시와 함께 그러한 아픔들이 숨겨진 식탁이라는 의미를 담아 “아픔의 가시들을 내려놓는다” 는 철학적 담론을 전하고 있다.
이제 이 시집의 마지막 부분에서 읽게 되는 시--“붉은 여행길”을 살펴보기로 한다.
쉴 새 없이 지나가는 붉은 풍경,
생의 속살도 붉을 거라는 생각 속에 잠겨요
붉은 나뭇잎들이 하나 둘 지고 있네요
비움은 성숙을 위한 시작인가 봐요
구비구비 도는 산길을 오릅니다
붉은 풍경을 흔드는 붉은 바람이 불고
생각은 붉은 땀을 흘립니다
급경사 구불길, 붉은색 주의 표시판
"사고가 많은 구간입니다"
영과 육의 결합이 이탈하는 환상에 어지럽습니다
속도와 반비례하는 붉은 나무들의 흔들림
묵시의 경고를 보냅니다
마음속 세상은, 백악기
그 어느 쯤의 시간에 멈춰 섰는지도 모릅니다
되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공룡의 발자국처럼 귀퉁이마다 닳았네요
평지에 들어서자 붉은 감동과 흥분을 휘날리며
점점 붉어지는 세상을 가로질러 가는 버스는 앞서 달려갑니다
여행길에 나는 빠르게 붉어집니다
(시, “붉은 여행길” 전문)
“붉은 여행길”이라는 시에서는 시인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인식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비구비 도는 산길을 오릅니다
붉은 풍경을 흔드는 붉은 바람이 불고
생각은 붉은 땀을 흘립니다
급경사 구불길, 붉은색 주의 표시판
"사고가 많은 구간입니다"
영과 육의 결합이 이탈하는 환상에 어지럽습니다
(시 붉은 여행길“의 부분)
황혼의 나이에, 그것도 단풍의 계절에 떠나는 여행길에서 시인은 “붉은 풍경” “붉은 바람” “붉은 땀“ ”붉은색 표지판”이라는 상징적 사물을 동원하여 자신에게 던져주는 묵시적 경고를 읽어낸다. 나이가 들수록 노년의 삶이 "사고가 많은 구간"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은 노년이 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위험을 자각하고 염려하는 면이라고 볼 수 있다.
“속도와 반비례하는 붉은 나무들의 흔들림” 역시 역설적인 삶의 현장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에게 닥친 노년의 삶에 대한 ‘사랑의 상징’인 붉은 색깔을 통하여 다가오는 내면의 다짐을 그려낸다.
이제까지 이대전 시인이 집중하여 드러내고 있는 시적 정서와 그 아우르는 시적 상징, 그리고 은유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모두冒頭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1904-1973)가 말한 것처럼 사실 우리 삶은 수많은 메타포 metaphor(=은유)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메타포 metaphor(=은유)를 활용하여 시적 정서의 아름다움과 “삶을 뒤집어 보기”를 통해 우리는 시적 감동과 조우하며 그 감동을 함께 누리고 새로운 정서적 깨달음에 다가서게 된다.
흔히 나이가 들면 어떤 “나이“라는 낡은 틀에 갇혀 시가 고담준론高談峻論에 빠져 시적 상투성에 매몰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상투성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시의 의식에 마주치게 된다는 것은 매우 삽상한 일이다.
시인의 인식은 다만 한 군데에 머물고 있지 않다.
과거의 회상이나 추억의 멍울이 만져지는 어쩔 수 없는 나이의 기억 속에서 워즈워스 Wordsworth가 말한 “고요로움 속에서 회상되는 정서”가 드러나는 ‘그리움’이라는 정서나, 시적 정서적 발현에 의한 자아성찰과도 같은 새로운 깨달음이나, 혹은 짐짓 세상을 돌아보다 발견되는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다가 ‘우리는 정말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다가서기도 하며, 주어진 사물을 들여다보며 삶의 건강한 긴장과 마주하거나 신앙적 자세를 취하게도 하는 다양한 층위의 감동을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그런 생각이나 자세가 “낯설게 하기”라는 시적 상징적 활동에 의해 새로움을 형상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넓은 세계관과 다양한 시선에 맞추어 보다 새로운 시적 발현을 함으로써 시적 상상력의 공간을 더 확장 하여가는 일은 시적 경험과 시인의 발전적 사고와 보폭을 맞추어 가야 하는 과제로 남는 경우가 있지만 시인이 살아가는 세상이나 활동의 범위가 축소되는 노년의 나이에는 피하기 어려운 면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습작을 통해 새로움과 마주하려는 시인의 노력은 그 경계를 뛰어넘는 사고력에 의해 많은 부분 개선되고 그 아름다움이 강화되고 있음은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나이 듦은 시를 쓰는 데에 다소 상투성이라는 장애를 주기는 하지만 이 시인은 그런 문제를 잘 극복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끝으로 이제까지 추구해 온 시의 세계를 더욱 뛰어난 새로움으로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이대전 시인이 대하는 시적 세계가 보다 새로움과 은유로 가득 찬 시로 채워지기를 바라면서 시의 평설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