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연설의 비밀-스탈린은 비판하되 체제는 비판하지 않는다
흐루시초프는 대표적인 조작 사건인 의사-반역자 사건이나 레닌그라드 사건 등에 대한 기록이 담긴 문서를 인용해 희생자의 숫자와 실명까지 구체적으로 공개하는 등 스탈린의 범죄를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대회장은 충격에 휩싸였고 몇몇 대의원은 실신했다. 연설문이 유출된 이후에는 여러 건의 소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흐루시초프 자신이 스탈린의 신임을 업고 정치적으로 성장한데가가 스탈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가 이런 연설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차적으로는 정치적 탄압의 재현을 막고, 희생자들에게 자유와 명예를 되돌려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작용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좀 더 복잡한 의도가 깔려 있다.

이 연설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것이었다. 조작 사건이 재조사되고 희생자들이 사면 · 복권되자, 탄압을 주도했던 당 지도부는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스스로 범죄를 밝힘으로써 비난을 막고자 했다. 또한 농업 및 소비재 산업 육성, 문화예술 분야의 해빙, 자본주의와의 평화 공존 등 스탈린 시대와 다른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시대를 둘로 구분해, 1934년 이후의 정치적 탄압 행위를 비판하면서도 그 이전의 공업화, 농업 집단화, 문화혁명 등의 정책과 이를 통해 확립된 소련 사회주의 체제를 정당화했다. 또한 수백만 민간인의 희생은 축소한 반면, 공산주의자들의 피해는 길게 설명함으로써 소련 공산당이 스탈린 범죄의 공범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했다. 그리고 스탈린의 성격적 결함과 그 측근의 출세욕을 개인숭배의 원인으로 지적함으로써 자신을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의 책임을 더는 동시에, 정적인 원로 스탈린주의자들을 출세주의자로 몰아 제거하고자 했다. 또한 그는 집단 지도를 원칙으로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비판의 근거로 인용하면서 자신의 권력 기반인 공산당의 정치적 · 이데올로기적 권위를 강화했다.

비밀 연설의 한계와 가능성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실각 이후 스탈린의 명예는 점차 회복된 반면 흐루시초프는 잊혀졌다. 흐루시초프가 재평가된 것은 1980년대 중엽 페레스트로이카(재편)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페레스트로이카를 주도한 고르바초프M. S. Gorbachev 등은 1953~1964년에 걸친 흐루시초프에 의한 해빙기에 청년기를 보낸 이른바 흐루시초프 세대였다. 이들은 흐루시초프와 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의 병폐를 극복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강화하려 했지만 달라진 상황 속에서 스탈린 비판은 소련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했고, 결국 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귀결되었다.
공산당 정통주의자들은 이 연설을 1991년 8월 소련 공산당의 붕괴, 나아가 소련 체제의 해체로 가는 첫 걸음으로 평가한 반면,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공산당 개혁가들은 당 개혁과 사회 민주화로 가는 중요한 계기이자 첫 페레스트로이카였다고 보았다. 흐루시초프의 비밀 연설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분분하지만, 흐루시초프의 청산에서 우리는 올바른 과거사 청산의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