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후기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기다리는 마음같이 초조하여라
단풍 같은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찬바람 미워서 꽃 속에 숨었네....
-가수 김상희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중에서-
2024년 추석 뒷날 아침, 마을 뒷동산을 올랐습니다. 평소 걷던 산책길에서 어느 벤치에서 쉬어가기도 하고, 체육 공원 같은 곳에서 이것저것 운동기구들을 만져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길목에서 발 앞에 보이는 도토리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직 무더위가 사그라지지 않은 추석이지만, 시절은 그래도 가을로 가는 입구에 서 있나 봅니다.
도토리 중 새파란 것 하나를 손에 집어 들고, 사진도 찍어 보았습니다.
그때 제 머리 위로 도토리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는 내 머리를 때린 상수리나무가 어떤 모습인지 올려다보았습니다. 아직 푸른 잎들이 풍성한 가지들이 달린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4 내지 5미터 높이로 굳건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 나무 저위로 아직도 무더위를 쏟아내는 파란 하늘이 드높이 보였습니다.
나는 어제까지 번역해 갈무리해놓은 작품 『빈곤의 밑바닥』에 대한 ‘역자 후기’를 쓰고 싶은 마음에 집을 향해 서둘러 내려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았습니다.
지난봄부터, 인터넷에서 구한 폴란드 작가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Waclaw Sieroszewski,1859-1945)의 작품 『빈곤의 밑바닥』(Dno nędzy)(1900)의 에스페란토 번역본 『La Fundo de l’Mizero』를 우리글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작가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는 폴란드인으로서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일본, 몽고, 야쿠트(사하공화국) 등 동양의 여러 나라를 소재로 수많은 작품을 쓴 폴란드 작가이자 민속학자이자 독립투사이자 정치인이었습니다.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폴란드에서 작품 활동을 하게 된 계기에는 『마르타』(Marta)의 작가 엘리자 오제슈코바의 적극적인 권유와 추천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폴란드 원작 『빈곤의 밑바닥』은 폴란드 번역가 카지미에시 베인(Kabe)이 에스페란토로 번역한 첫 작품이기도 합니다. 카지미에시 베인은 이후 엘리자 오제슈코바의 단편작품들- 『중단된 멜로디』, 『선한 부인』, 『전설』-을 번역해 냄으로써 에스페란토 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작품 『빈곤의 밑바닥』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온 세상을 강타해, 우리는 2020년대 초반을 그 두려움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 전염병으로 인해 국내외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자인 나는 그동안 번역해 둔 작품들을 진달래 출판사를 통해 소개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에스페란토 번역가들의 관심을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카지미에시 베인의 단편 번역작들을 챙겨 읽게 되었습니다.
『빈곤의 밑바닥』을 쓴 폴란드 작가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1903년 동양탐험여행에 참가하면서, 일본, 몽고, 중국, 한국을 방문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당시 일본 선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후 신포까지 배로 가서, 다시 원산을 거쳐 말을 타고 서울에 들러 약 두 달간 여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 방문을 통해 광범위한 기행문 형식의 한국 보고서인 『한국, 극동의 열쇠』(1905년)를 러시아어와 폴란드어로 출간했는데, 이 작품은 당시 한국 사회를 속속들이 소개해 놓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00년이 지나 서울에서 『코레야 1903년 가을: 러시아 학자 세로셰프스키의 대한제국 견문록』(김진영 외 옮김. 서울: 개마고원, 2006)으로 우리말로 소개되었습니다. 역자인 나도 이 작품을 한글로 읽게 되었는데, 그 작품 속에는 당시 한국을 방문하면서 찍은 사진 자료들이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1906년 폴란드어로 출간된 『기생 월선이』 -대나무는 스스로 자신의 잎을 떨군다-(1906년 폴란드어로 출간, 양정숙 옮김, 도서출판 남지, 서울, 1995년 재판)도 한글로 번역되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의 한국어판 서문에 1990-1994년 주한 폴란드대사를 지낸 엥졔이 끄라꼬프스끼가 서문에 쓴 한 구절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의 한국에 대한 열정의 원천은 뚜렷합니다. 그는 단지 작가였던 것만이 아니고 폴란드 독립을 위해 활발히 투쟁한 투사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활동으로 인해 그는 수차례에 걸쳐 감옥에 갇혔으며 폴란드를 지배한 러시아 정부에 의해 시베리아로 유배당했습니다. 날카로운 관찰자로서 그가 한국을 방문할 당시 한국은 오래된 훌륭한 문화와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로서 외국세력에 의해 자주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불의를 참지 못하고 압박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인 그는 한국인들의 편에 자신의 사랑을 보냈습니다.”
민속학자이기도 한 작가는 한국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그렇게 자신의 작품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다시 우리 작품 『빈곤의 밑바닥』으로 가 볼까요?
폴란드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투옥된 작가는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로 10여 년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곳 시베리아 원시림 타이가 지역의 야쿠트족 사람들의 생활상과 민속 등을 또한 속속들이 체험하게 되고, 야쿠트족 여인과 결혼도 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이 이 『빈곤의 밑바닥』 작품 속에도 들어 있지 않을까요?
이 작품의 소재인 한센병에 대해서 번역자인 필자도 한센병에 대한 지식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마을 사람들이나, 또 급우들이 전하는 말에 따라, 그 병자들을 길에서 만나게 될까 봐, -물론 한 번도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무서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한적한 시골 신작로에서 소년이 혼자 길을 걸으면 근처 보리밭이나 밀밭에서 그 환자가 곧장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무서움 말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질병 중 하나인 한센병은, 1873년 노르웨이의 한센(Hansen, 1841~1912)에 의해 이 병을 일으키는 나균(Mycobacterium leprae)이 최초로 발견되었습니다. 한센병은 나균에 의한 만성감염병이지만 나균에 대한 면역기능이 아주 약한 경우에만 발생되고, 조기에 진단하여 조기치료를 시작하면 후유증이 거의 없이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부산에 이사 온 뒤로는, 부산 시내에도 그런 환자들을 위한 수용시설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독자들은 한센병 환자들이 살아온 소록도 이야기를 한두 번은 들었을 겁니다.
한센병은 잘 관리하고 치료를 받으면 그 아픔을 이겨나갈 수 있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00여 년 전에는 나라마다 이 병 환자들에게는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정책을 써 왔습니다.
이 작품『빈곤의 밑바닥』에서도 그 병으로 인한 고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어, 그 참담함이 다시 한번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이 작품은 한센병 환자들이 그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사회적 편견과 차별 속에서도, 삶에 대한 희망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희망으로 한 번 읽고,
좌절 속에서도 한 번 읽고
눈물로도 한 번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번역을 격려해 주시는 박연수 박사님과 최성대 교수님께도,
번역 공간을 묵묵히 지켜보는 가족에게도 고마움을 남깁니다.
2024년 9월 추석을 뒤로하고
지난 4년간 온 세상을 뒤집어놓은
‘코로나 19’ 전염병을 돌아보며
편집자의 글
2020년 초,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했을 때의 그 공포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하루하루 뉴스에서 전해지는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는 마치 전쟁의 전황을 알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고, 거리두기를 지켰습니다.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바이러스가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일상은 뒤틀리고 고요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작은 희망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온라인으로 친구들과 소통하며, 뒤늦은 공부를 하고, 소중한 책을 펴내고, 다양한 책을 읽는 등 나름의 방식으로 이겨나갔습니다. 언젠가 이 상황이 끝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이 우리를 지탱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코로나19는 우리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세상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붐비고, 카페와 식당이 활기를 띠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갑니다.
우리는 고통을 겪으며 서로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함께하는 시간의 가치를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있지만, 그 상처 위에 세운 새로운 일상은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도 대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 시절의 고통이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고,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상이 회복되는 지금, 우리는 매일매일을 감사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와 함께 출발한 진달래 출판사는 여전히 고귀한 가치를 품고 평화의 언어를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무수히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 오태영 진달래 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