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데비 늪지에서 미라로 발굴된 아이의 시신
어느 어린 삶이 왜 늪 속에 잠겨야 했을까?
“모두에게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이 여자아이의 퍼즐을 풀고 싶었다.”_본문에서
1952년 독일, 빈데비 늪에서 토탄을 캐던 일꾼들이 늪지 미라를 발견한다. 2,000년 동안 늪 속에 보존된 미라는 인류학자의 조사에 따라 십 대 아이의 시신임이 밝혀진다. 유독 왜소한 몸집을 지닌 아이는 금발이 반쯤 깎이고, 정교하게 짜인 격자무늬 천으로 눈이 가려진 채, 마치 ‘왜?’라고 묻는 듯 입을 살짝 벌린 표정을 짓고는 잠들었다. 이 아이는 어째서 그토록 으스스한 외딴 장소에서, 왜 그토록 일찍 생을 마감해야 했을까? 로이스 로리는 그 이유를 역사의 틀 안에서 짐작해 보고자 정성스레 이야기의 퍼즐을 맞춰 간다.
그렇게 고고학적 발견에서 출발하여, 긴장감 넘치고 가슴 아픈 두 서사가 전개된다. 소중한 이들을 지킬 수 있는 강한 힘을 열망하며 최초의 여자 전사를 꿈꾼 소녀 에스트릴트와 과학이라는 학문이 등장하기도 전에 자연과 생명을 탐구한 몸이 불편한 소년 파리크의 이야기다. 두 이야기 모두 철기시대를 살아갔을 어느 아이의 삶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복원해 낸 아름다운 이야기이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로도 이름 없이 길을 터 왔을 앞서 걸은 이들을 기억하는 이야기다. 남들보다 조금은 특별했기에 평범치 않은 죽음을 맞았을지 모른다는 발상과 함께, 언제 어디에든 있어 왔을 선구자적 인물들을 그려 내어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오늘날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낸 작가의 역량이 돋보인다.
여자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낸 에스트릴트와 성치 못한 몸에 외톨이 신세여도 빛나는 지혜와 따스한 가슴으로 세상을 대한 파리크는 시대의 틀을 벗어나 용감하게 새로운 미래를 꿈꾼 아이들이다. 약자 소외와 이기심이 퍼져 가고 돌봄 노동의 가치가 쉽게 간과되는 오늘날, 두 아이가 간직했던 마음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미라로 발굴된 ‘빈데비 아이’의 마지막 표정처럼 서늘한 물음표를 마주하게 된다.
◆ 주어진 역할의 한계에 도전한 소녀와
용감하고 좋은 일 하나를 해낸 소년
“사람은 죽기 전에 꼭 용감하고 좋은 일을 한 가지 해야 하는데, 우리 외삼촌은 그렇게 했대. 전쟁터에서 다른 전사를 도와줬거든. 용감하고 좋은 일을 했다면 충분히 준비된 채 죽은 거니까, 다른 사람들도 슬퍼하지 말아야 한대. 그 사람도, 그 사람이 한 일도 늘 기억될 테니까.”_본문에서
에스트릴트는 남다른 열망을 품은 야심 찬 여자아이다. 또래 남자아이들의 곁눈질이 아닌 강한 힘을 갈망한다. 여자가 하는 출산과 육아, 살림도 남자들의 일만큼 중요하다고들 말하지만, 정작 똑같이 중요하게 여겨지진 않는 점이 에스트릴트 눈에는 이상하다. 누구도 여자들의 일을 응원하거나 승리의 월계관을 둘러 주지 않는다. 에스트릴트는 여자의 삶이 이뿐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여자 전사로 거듭나기를 꿈꾸며 매일 새벽같이 방패를 들고 전사의 구호를 훈련한다.
한편 아주 어릴 때 부모를 여읜 파리크는 몸이 불편하고 병약하지만, 가슴속에 강렬한 호기심과 학구열을 품은 소년이다. 늪에 사는 늙은 부엉이만이 자기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유일한 친구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파리크는 자연과 생명을 벗 삼아 외로움을 달래고, 죽은 새나 송아지 뼈 따위를 모아 ‘배움의 선반’에 올려 두고 관찰하며 탐구한다. 어느 겨울날 자신을 구박해 온 대장장이가 빙판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치자, 파리크는 형벌에 처할지도 모르는 두려움보다도 괴로워하는 대장장이의 다리를 자신이 고칠 수 있겠다는 이타적인 마음이 앞서 용기를 낸다.
◆ 그럼에도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가게 하는
모든 세기의 모든 삶에 깃든 우리 안에 내재된 힘
이야기꾼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닫힌 문을 열어 보고, 구석진 곳을 들여다보고, 사람들을 그들 자신이게끔 하는 모든 이유를 알아내려 애쓰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작가의 시선이 철기시대라는 과거 인류까지 거슬러 올라가 더욱 확장된 모습으로 특별하게 다가온다. 종교와 계급이 지배하는 사회, 역할이 엄격하게 고정되어 있고, 다름이 수용되지 않던 억압되고 경직된 과거 사회의 모습이 작가가 앞서서 펼쳐 보인 모든 것이 통제된 획일적인 미래 사회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논쟁적이고 민감한 소재를 다루기를 주저하지 않는 작가는 늪지 미라라는 낯설고 섬뜩한 소재로 주의를 환기한다.
그러나 ‘죽음’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그 죽음에 앞서 선행되었을 ‘삶’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삶을 이루는 잔잔히 분투하는 일상과 마음속에 간절히 품었을 강렬한 열망, 누군가에게 베풀었을 선한 용기에 초점이 실린다. 모든 세기의 모든 삶에 깃든 가장 보편적이고도 가치 있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설사 억압과 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난무하는 사회일지라도, 인류는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살고, 배우고, 베풀고, 더 나은 길을 닦아 가는 우리 안에 내재된 강인한 힘이라는 메시지가 담겼다. 언제나 결국 이겨 내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묵묵히 그려 낸 작품에서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질문들이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