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김영수의 시들은 폭발하는 별처럼 원심적이다. 안으로 접어들어 출구를 막고 존재를 특정한 범주에 가두려는 모든 구심적 노력은 김영수의 시에서 붕괴하고 중력을 잃는다. 김영수가 볼 때 세계를 규정하고 단순화하여 그것을 복제하거나 재현하려는 모든 노력은 죽은 별의 세계이다. 김영수는 죽은 별에 시적 핵융합을 일으켜 그것의 중력 위치 에너지를 발산시킨다. 죽은 별에서 열폭주가 일어나 별들이 폭파될 때 세계는 원심력으로 넘쳐나며 파편화된다. 김영수는 세계가 규정 가능하고 따라서 복제와 재현이 가능하다는 모든 거짓말을 믿지 않는다. 그는 시적 충격파를 일으켜 화석화된 세계를 해체하고 세계의 성분들을 원심력의 벡터 밖으로 날려 보낸다. 구심력을 잃고 원심력에 몸을 내준 세계가 무엇-되기의 과정 자체로 바뀔 때, 세계는 복제 불가능한 복합체, 재현 불가능한 변화체(changing-body)가 된다. 세계는 계속 흐르고 움직이므로 규정할 수 없고 단정 내릴 수 없다. 세계는 계속해서 복제와 재현의 감옥을 때려 부순다.
닮지 않았다
새는 새를 닮지 않았다
가끔씩 붕괴하는 얼굴, 목소리들
고맙게도 나는 새를, 강을 따라가는 새를,
황혼에 몸을 적시며 자욱이 하나의 점으로
돌아가는 작은 새를 닮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느티나무의 빈집처럼
떠나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새들을 닮았다
어둠은 굼뜨고 아직 가시지 않는 해가
숲속에서 어슬렁거리는 동안
새들은 검은 내장까지 응답해야 하는
붉은 저녁을 맞는다
영원을 허락하는 것처럼
붉음이 졸아드는 나무에 순풍은 불고
새들은 가지를 옮겨가며 수다를 떤다
새의 주위를 가는 창공이 떠돌고
산과 들판이 우수수 일어선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록
새의 말을 받아 숨기는 풍경
언제나 복제할 수 없는 높이나 넓이로
커버린 풍경이다
― 「새가 있는 소묘」 부분
새가 새를 닮지 않았다니 무슨 말인가. 새는 항상 다른 어떤 것으로 “붕괴하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새는 새를 닮지 않았다”는 모순어법은 모순을 가장하여 모순을 이긴다. 새는 늘 현재의 새가 아닌 다른 무엇-되기의 과정에 있다. 그것이 새의 존재-운동이다. 새만 그런 것이 아니므로 “나” 역시 “새를 닮았다”는 문장은 운동하며 변화하는 존재의 보편성에 대한 비모순적 진술이다. 새들이 움직일 때 새들은 원래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그것이 존재의 본질이다. “새의 주위를 가는 창공이 떠돌고”라는 표현도 재미있다. 창공이 놋쇠처럼 무겁고 두꺼운 억압이라면, 새는 “붕괴하는 얼굴”의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시인은 “가는 창공”이라는 매우 희귀한 표현을 통해 변화체로서 존재의 속성을 드러낸다. “산과 들판”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들은 “우수수 일어선다”. 새가 변화되고, 그것을 따라 내가 붕괴하고, “가는 창공” 속으로 산과 들판이 우수수 일어날 때, 세계 전체는 “복제할 수 없는 높이나 넓이로/커버린 풍경”이 된다. 김영수는 이렇게 존재가 폭발하는 행성처럼 변화하는 과정을 포착한다. 시인이 항상 무엇-되기의 과정에 있는 움직임을 ‘움직이며’ 잡아내므로 그 무엇엔 고정된 실체가 없다. 만일 김영수의 시를 난해하거나 가독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시의 이런 특징 때문이다. 난해하지 않고 가독성이 좋은 시들은 움직이는 세계를 부동(不動)의 세계로 압축하고 규정해서 전해준다. 모든 변화와 붕괴와 폭발의 가능성을 폐쇄한 복제와 재현의 세계가 ‘가독성이 좋은’ 세계로 유통된다. 그런 가짜 세계는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복잡한 사유를 싫어하는 영혼을 단순성의 마취제로 위로한다. 마취된 정신은 잠깐의 위로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시 붕괴하는 세계, 불가해한 세계와 마주친다. 가짜 단순성은 구원이 아니다. 문학은 세계의 복잡성과 비결정성을 견디는 언어이다. 문학은 ‘손쉬운 해결’이라는 가짜 프로파간다(propaganda)와 싸운다.
―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시인의 말
별이 빛나는 찻잔을 가졌다.
꽃밭에는 언제나 바람이 울고
한두 번 머뭇거리다 지나가는 발걸음들이 있었다.
찬란한 것들은 차라리 지나갔다.
그럴만한 처지들만 서로 울음을 참으며
복닥불을 키웠다.
간신히 다가온 아침에
바람은 모두가 동의하는 꽃을 만들고 사라졌다.
약속은 없었지만 찻잔이라는 정중함도
시름을 뒤적이는 지난 일도 만났다.
세상의 모든 결손이 찻잔에 잠시 녹았다.
2024년 9월
김영수
시인의 산문
부재하는 것들의 강가에 위대한 우상과 다 쓰고 버린 거짓말들이 있었다. 사용법도 없는 계절이 여럿 쌓여 있었고 아무도 만지지 않았다. 함께라는 각서에 사인한 서류가 쓰레기장 파지처럼 온통 날리고 있었다. 예언들은 떠나지 못하고 실화가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