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픔들은,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들은
어떻게 해야 가릴 수 있는 걸까요.”
독립출판물 《30대 백수 쓰레기의 일기》로
‘김봉철’이라는 장르를 만든 김봉철의 첫 소설집
《30대 백수 쓰레기의 일기》로 독립출판계에 강렬하게 입문하여 독자들을 만나 온 김봉철의 첫 소설집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이 출간되었다. 첫 책을 선보인 이후 쓰기를 멈추지 않고‘김봉철’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내며 단단히 자신의 세계를 다져온 그가 소설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찾아왔다. 이 책의 장르도 역시 김봉철이다. 평범한 인간의 내면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그의 시선은 소설이라는 틀 안에서 더욱 풍성하게 빛나며 오직 김봉철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책에는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 그 어딘가에 자리한 이야기 네 편을 담았다. 책 한 권을 단숨에 읽게 하는 김봉철만의 필치와 상상력을 따라가며, 그가 선보이는 허구의 세계를 마음껏 누비기를 권한다. 소설 틈 사이사이에 비집고 넣어둔 작가의 진심과 마음이 당신에게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시원에 돌아와 누워 제가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던 미래를 떠올렸습니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던 그 꿈같은 날들을요. 다시 왼손을 뻗어 천장을 향해 내밀었습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왼쪽 얼굴을 손으로 덮어 한눈을 가렸습니다. 원근이 사라진다면,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없어진다면 모든 것은 결국 같아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진짜도 가짜도 내가 꿈꾸던 미래와 현실도, 어떤 식으로도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세상도 결국에는 평평해져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
-〈악귀 일기〉 중에서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 그 사이에서
김봉철이 손 틈새로 끌어올린 허구의 세계들
첫 단편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은〉은 4년 차 출판 편집자 이새콤의 이야기다. “노란 포스트잇에 ‘오로지 진실만을 간수하고자 하는 교정’이라고 적은 뒤 모니터 한쪽에 붙여놓기도” 한 그는 팩트 체크하는 일에 유독 신경을 쓴다. 그런 그가 매일 거짓말을 지어내는 한 작가를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뻗어나간다. “새콤 씨는 습관처럼 팩트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여부와 다른 구석이 있지는 않을까? 진심이 담겨 있을까? 진심을 담아도 되는 걸까? 사실과 너무 가까운 것은 아닐까? 숨겨야 할 것은 숨기고 보여줘야 할 것은 드러내는 것이 이야기라면, 나는 무엇을 숨기고 또 무엇을 드러내야 하는 걸까. 나는 누군가에게 읽힐 만한 이야기였을까?”
두 번째 단편 〈무촌 제17구역 - 아마릴리스의 노예〉는 노동 현장에서 일했던 작가의 경험이 녹아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자신을 약점을 숨기기 위해 타인에게 위악을 부리는 직영 반장 이순철과 자신의 직업에, 맡은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아마릴리스의 노예’ 김성환이 노동 현장에서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써냈다. “관리자와 친한 김성환이 자신이 20년 넘게 일용직으로만 일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닐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갓따로 반생이를 끊어 그의 입을 묶어버리고만 싶었다.”
마지막 단편 〈아버지의 영화〉는 과거 사업체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실패를 겪고, 경비 일에서도 나이를 이유로 실직한 아버지와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어머니가 가정 경제를 책임지게 되면서, 수십 년간 봐왔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은 뒤바뀐다. 요가 영상을 보기 위한 태블릿을 구해줄 수 있냐는 어머니의 말로 듣도 보도 못했던 아버지의 그림 작업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지 못한 한 편의 영화로 완성된다.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작품활동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안방에서는 뭔가를 그리거나 자르고 가끔 무언가 말을 하는 소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으며 내게 제작비를 요구해 오셔서 지갑을 열어야 했으나 나도 일상에 바빠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두 달 뒤 어느 일요일, 상영회를 열겠다며 그는 온 가족을 소집했다.”
중편 소설 〈악귀 일기〉는 ‘이야기꾼’ 김봉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곳곳에 그의 경험을 녹여 글의 몰입도를 더한 이 작품은 TV 속 대학생이 ‘진짜’ 사람들이고 실제 존재하는 ‘우리’는 오히려 ‘가짜’처럼 느끼는 주인공 김은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영부영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려 하지만, 부유하는 부표처럼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둥둥 떠다닐 뿐이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함께라면 ‘진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은미는 다시 정착하는 삶을 꿈꾸며 텔레마케팅 회사에 들어가 일을 시작한다. 이후 여러 사건을 통해 고시원에 갇혀버린 히키코모리로, 희대의 악플러로, 자신의 글을 쓰는 작가로, 주인공의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들과 인간의 외로움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룬다. “한쪽 눈을 가려 사라진 원근으로 누구의 마음 깊은 곳에도 닿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저 저의 그늘을 가리는 데만 급급했던 것은 아닐까요. 속죄를, 저는 속죄를 해야만 했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의 그늘을 가릴 수만 있다면, 저는 끝없는 죄인이어야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