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어딘가에서 조금이지만 장미 향이 풍겼다.
굳이 따지자면 한 송이 정도.”
일곱 살 때 후각을 잃은 뒤로 단 하나의 냄새만을 맡게 된 서화. 서화는 죽음의 냄새를 감지한다.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 냄새를 서화는 ‘하얀 냄새’라 부른다. 사람들은 시각장애나 청각장애보단 후각장애가 낫지 않냐며 함부로 말하곤 하지만, 서화에게 냄새를 잃는 일은 운명을 뒤바꾼 사건이었다. 냄새를 맡을 수 없어 무취(無臭)의 세상에 갇힌 엄마를 대신해 향기를 전하는 창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화는 절망한다, 엄마와 세상을 더 이상 연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십 년 후, 자신이 맡을 수 있는 유일한 냄새를 풍기는 여자를 만난다. 단미다.
늦은 밤 굳이 북카페로 돌아간 이유를 서화는 모른다. 하지만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건 분명히 단미일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손에 들고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던 단미. 자신이 들고 있던 소설의 제목처럼 단미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갇혀 있었다. 온 세상은 회색빛이었다. 고개를 들어야 겨우 보이는 작은 세상을 그녀는 원했고 갈망했고, 끝내는 포기했다. 하지만 서화를 만나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단미는 누구보다 짙은 ‘하얀 냄새’를 풍겼지만 그것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내음은 아니었다. 단미를 처음 만났을 때 서화는 ‘조금이지만 장미 향’을 느꼈다. ‘굳이 따지자면 한 송이 정도’의 옅은 내음이었지만 서화와 단미가 맞물린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그 운명은 둘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우연’과 ‘행운’을 뜻하는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우연으로 시작된 둘의 만남은 끝내 행운을 향해 나아간다. 비록 그 과정이 지난하고 험난하더라도 말이다.
한 송이가 풍기는 아득함 그 너머,
단 한 사람의 손을 잡는 이야기
탄생과 죽음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신비롭고 큰 사건이며, 삶은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지만 꼭 해내야만 하는 숙제와 같다. 『내음』의 인물들은 바로 이 삶과 죽음이라는 불가해한 사건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그 중심에 있는 서화와 단미는 세상에 올 때부터 각자의 역할을 받았다. 서화의 엄마는 서화를 통해 세상의 내음을 맡았고 단미의 아버지는 단미를 통해 세상에 자신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매개체로서 존재하던 서화와 단미가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이 넘나드는 철학과 사건의 크기와는 달리 이를 서술하는 작가는 한 발짝 떨어져서 시종일관 담담하고 담백한 어조로 일관한다. 그렇기에 서로 손을 잡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서화와 단미의 발밑이 비록 까마득한 추락의 공간이라 해도,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누구 하나 손을 놓지 않을 거라는 단단한 믿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믿음은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순간에도 나는 너의 손을 잡을 거라는 믿음. 누군가의 매개체로 존재하던 시절의 믿음도, 운명에 지배되고 말 것이라고 포기했던 시절의 믿음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두 변해가지만 서화와 단미가 가진 단 하나의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믿음은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끝끝내 서로를 구원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내음』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두 사람의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은 두 사람이 죽음의 문턱에서도 지키고자 한 가치, 믿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