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적 아픔을 토로하는 소설
자기 앞의 삶을 꾸역꾸역 견뎌내는 인물들
여전히 언어를 통해 우리의 인생과 세계를 성찰하게 만드는 소설
[그래도 우리는]은 박혜원 작가가 첫 번째 소설집 [비상하는 방]을 낸 지 10년이 넘어 출간한 두 번째 소설집으로, 삶의 깊이만큼 작품 또한 완숙해졌다고 할 것이다. [비상하는 방]에서 느꼈던 예리함이나 실험적인 면모는 마모되고 서슬 시퍼렇고 날 섰던 낱말의 끝은 조금 무뎌져 있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우리의 삶 깊은 곳의 상처와 갈등을 어루만지며 포용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많은 한국소설 속의 인물들은, 불안과 공포를 지나 사람들과의 만남에 서로 서툴고 낯설어한다고 한다. 또한 그들의 사회적 범위도 가족이나 친숙한 지인으로 축소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령화를 반영하듯, 서사의 핵심적 인물로 노인이 많아졌으며, 노인과 관련된 돌봄과 노화, 그리고 은퇴 후에도 계속되는 노동의 문제가 많이 다뤄진다고 한다. 박혜원의 소설집 [그래도 우리는]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라서, 역시 ‘동시대’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너무 괴로워 몸부림을 치지 않고 곡예 같은 삶의 경계를 넘나들거나 극단을 치닫는 감정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타다가 일탈하지도 않으며 가슴 저미는 절망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다. 그들은 삶의 어떤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그저 자기 앞의 삶을 꾸역꾸역 견뎌내고 있다. 그만큼 그들의 감각은 무뎌지고 따라서 극단을 치닫는 치열함도 사라져, 씁쓸하고 지루하며 한심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들은 애잔하고 정이 간다. 그만큼 체념하거나 타협할 일도 많아졌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다소 쓸쓸하지만, 또 그만큼 삶을 포용하며 편안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을 따라가다 보면, 얼핏 보기엔 무지렁이 같지만 그런 보통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되며 그들의 생활력에 진정한 존경심을 갖게 된다. 또한 세월에 마모된 노쇠한 모습이 아니라 젊은 날의 찬란했던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인간의 근원적 그리움과 욕망, 아무리 근면 성실한 삶을 영위한다 해도 인간은 누구나 그 마음 안에 허영심이 내재해 있음을 만나게도 된다. 또한 노년기에 황혼육아를 감당하는 세대가 겪어내는 갈등과 극복의 과정도 섬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그와는 반대로 미래가 불투명하고 암울한 젊은이의 초상화도 만날 수 있다.
2023년 경남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제35회 ‘경남문학상’에서, ‘올해의 장르별 작품상’ 소설부문에 선정된 단편소설 〈작품비〉는, 지방의 작가들이 예술작품에 대한 가치를 얼마나 정당하게 환산 받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며, 수많은 예술가들이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는 걸 되짚어보게 하는 작품이다. 그 외의 작품에서도 예술인이 처한 현실고와 그 극복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 박혜원은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인생과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인간의 언어는 협소하고 부자유스럽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 언어에 의탁하여 글을 쓰고 싶다’고 하며, ‘삶도 단순해지고 글도 단순해지고 싶은데, 나는 여전히 많은 말들을 쏟아내며 또 책을 엮었다. 우리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중에는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이 책에 담은 나의 이야기들이 그래도 들을 만한 군소리이길 바랄 뿐이’라고도 한다.
인간을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즉 언어적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찰스 다윈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언어 능력’을 꼽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 어떤 형태로든 언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래도 우리는]은 여전히 언어를 통해 우리의 인생과 세계를 들여다보며 성찰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