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그리고 ‘퀴어’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배회하며
새들로부터 배운 자유와 사랑, 횡단과 연대
크리스천 쿠퍼는 스스로를 흑인이고, 게이이며, SF와 판타지를 사랑하는 괴짜Nerd라고 소개한다. 1970년대, 성소수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크리스천에게 청소년기는 “무덤 속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크리스천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지만 가족에게조차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에게 흑인이라는 인종적 정체성과 게이라는 성 지향성은 비슷하면서도 상반된 소수자적 경험을 하게 했다. 인종적 정체성은 숨길 수 없지만, 가족을 비롯한 공동체 안에서는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반면 성 지향성은 숨길 수 있는 대신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숨겨야 하는 정체성이었다. 그는 그 모순적인 고통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백인 동급생들이 “니거Nigger!”라고 소리친다면, 적어도 집에서는 엄마가 당신을 포옹하고 위로하거나 이해해줄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호모!”라고 소리치며 당신이 지금껏 집이라고 믿던 곳에서 쫓아낸다면?” 흑인이자 게이로 살아가는 것은 안전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는, 비밀 속에 고립되는 일이었다.
고독 속에서 새라는 존재에 매료되며 크리스천은 새들의 세상을 자신의 도피처이자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로 삼았다.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퀴어 청소년이었던 그는 탐조를 하며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았다. 바쁜 일상을 사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새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새들은 자기 방식대로 날아오르며, 한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거리낌 없이 경계를 넘는다. 크리스천은 붉은어깨검정새의 빛깔에 감탄하고, 희귀한 커틀랜드아메리카솔새를 쫓고, 굴뚝새의 노래에 이끌리며 위로받았고 삶의 세계로 나왔다.
탐조는 미국에서 유서 깊은 야외 활동이지만 인종화된 취미이다. 1970년대에 아버지와 함께 탐조를 시작한 이래 크리스천은 나이 들고 교양 있는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탐조 모임의 유일한 흑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센트럴파크에 새를 보기 위해 모인 탐조인들이 나이와 성별, 인종에 관계없이 서로를 동료로 여기고 우정을 나누는 태도는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크리스천은 아침 일찍부터 쌍안경을 들고 공원으로 나서며 이렇게 새를 찬미한다. “한계 없는 공간으로 몸을 던지는 새들을 보며 지상에 묶인 우리는 날개 달린 꿈을 꾼다.” 이 책은 흑인이자 성소수자로서 살아가며 탐조라는 창을 통해 더 넓은 세상과 연결된 크리스천의 진솔한 에세이이자 자기고백이며, 아름다운 새들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매혹적인 초대장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이름을 붙이는 일,
다른 방식으로 보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
닫힌 문을 열고 날개를 펼치는 일에 대하여
어떤 새를 알아보고, 여러 분류 체계 중 어디 속하는지 확인하고, 그 새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오랜 시간을 들여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일이다. 크리스천은 탐조하듯 천천히 자신의 정체성에 이름을 붙이고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떠난 부에노스아이레스 여행에서 크리스천은 처음으로 자신이 ‘흑인이기 때문에’ 매력적인 사람으로 여겨지는 일을 경험하기도 한다. 탐조인의 입장에서 흔한 새라고만 여겼던 큰검은찌르레기가 어린아이의 눈에는 무척 아름다운 새로 보이는 것처럼, 아름다움은 상대적이며 누군가가 아름답다는 것을 인지하려면 단지 관점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크리스천은 오랜 꿈이었던 마블 코믹스에 입사해 편집자로 일했다. 일찍이 그는 다양한 외계 종족이 등장하며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스타트렉〉이나 박해받는 돌연변이들이 세상을 구하는 〈엑스맨〉 시리즈에서 자신이 이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발견했다. 그는 담당했던 코믹스 〈알파 플라이트〉의 캐릭터 ‘노스스타’를 코믹스 역사상 최초로 커밍아웃한 히어로로 만들었고, 계속해서 다양한 인종과 퀴어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의 서사를 써내려갔다. 편집장이 경고를 하거나 독자의 반발이 있기도 했지만, 크리스천의 창작은 마블 코믹스의 진보를 이끌어냈고 수많은 유색인·퀴어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나를 위협하는 흑인 남성이 있다”고 경찰에 허위 신고를 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던 ‘센트럴파크 사건’을 겪고도 크리스천은 흑인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머뭇거리지 않았고, 흑인이자 게이로 살아온 자신을 드러내고 커밍아웃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와 다시는 벽장 속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새장이 아닌 하늘에서 살아가는 새처럼 자유를 찾았다.
다른 생명체와 마주보고,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경이로운 탐조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이제 60대가 된 크리스천은 여전히 매일 아침 뉴욕 센트럴파크를 산책하는 흑인 퀴어 탐조인이다. 탐조 활동을 통해 수많은 일을 경험한 그는 새의 아름다움과 탐조의 경이로움을 이렇게 묘사한다. “탐조는 당신의 시각을 바꿔놓을 것이고, 새로운 의미를 더할 것이고, 그것들을 서로 연결할 것이다. 소리와 계절을, 멀리 떨어진 장소를, 우리를 초월하는 동시에 포용하는 야생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내 삶에서, 탐조는 경이로움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탐조는 새를 관찰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새들이 살아가는 자연 환경까지 시야를 넓히고 소중히 여기는 활동이다. 이 책은 놀라운 새들의 모습과 탐조의 매력을 알려주는 안내서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인지하고 다른 세계와 연결되며 세계를 확장시킨 한 사람의 경험담이자 평생 소수자로 살아온 생존자의 일대기이기도 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지금껏 무심코 지나쳤던 새들에게 관심을 갖고 지나가는 새를 한 번 더 유심히 보게 될 것이다. 또한 나와 다른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되고 싶은 열망이 생겨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