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는 내가 시인인 줄 몰랐”다는 이문길 시인의 자선 시선집. 지금껏 열일곱 권의 시집을 낸 바 있는 시인의 진솔한 자선이다. 이어 시인은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나는 살 수 없었다는 것을” 시를 골라내면서 “이번에 알았다”고 고백한다.
편집자에게 전화기 너머 반농담 반진담으로 전한 말 “내 시 독자가 한 스무 명쯤 되는 것 같아. 그 사람들 가운데 두어 명이 내 시를 읽고 울었다는데 내가 시를 안 쓸 수 있어야지”
시인의 시집에는 어떤 장식도 하지 못하게 하는 시인의 엄결함이 있다. 그냥 그대로일 것. 그냥 두어서 눈물에 잠길 것. 아주 깊지는 않게, 하지만 얕게는 아니게 가라앉아 머물되 허우적거리지는 않을 것. 그대로 시인 듯 시 아닌 듯 스밀 것. 나아가 사람도 아닌 듯. 그저 슬픔인 듯. 이게 아마 시인이 품고자 하는 마음일 듯하다. 보통의 시선집이라면 시인의 연보쯤은 들어갈 터인데 시인은 이마저 거부하고 있다.
시린 새벽 옹달샘의 샘물을 떠내면서 미동의 물결도 내보이기를 꺼려하는 마음이 단단하게 풀어져 있다. 골라낸 시의 제목들도 어쩜 모두 하나같이 “돌, 강, 사람, 폭포, 개구리, 엄마, 하늘, 산, 겨울, 뻐꾸기, 바람, 장마, 별, 바다, 달밤, 도깨비” 같은 것들이다. 이토록 도저한 미니멀리즘이 있을까.
시인의 시 「시의 본질」에 지극하게 새겨놓은 적막함. 이문길 시인은 삶도 시도 적막하다. 그의 시를 읽는 우리는 스스로 몸과 마음을 자꾸 낮추어 바닥에 닿고만 싶어지고 자주 부끄러워진다. 울고 울다 울다 보면 적막에 가닿을까. 시집을 갈무리하는 마음 또한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