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세상의 진실을 말하는 시,
올곧은 나무 같은 ‘시인의 존재론’
천양희의 시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옷깃을 여미게 된다. 시편마다 고통과 슬픔으로 단련했을 고귀한 시어들이 어둠 속의 별빛처럼 형형한 덕분이다. 시인은 “물음표 같은 세월”(「바람역」) 속에서 “시를 쓰는 것은/목숨에 대한 반성문”(「반성문」)이라는 굳은 심지로 시를 써나간다. “운명에 만약이란 없”다고 믿으며, 신과 타인에게서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다. 지독하게 고독한 세계에서 시인은 “끝 모를 간절함밖에 남은 것이 없는”(「삼분간」) 삶을 겸허하게 품어 안을 뿐이다. 지난 60년간, 시인이 세계를 품는 방식은 시를 쓰고 또 쓰는 것이었다. 마치 구도자와 같은 그러한 자세는 이 시집에도 우뚝하게 새겨져 있다. 그는 “시 쓰기란/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도정”(「추분의 시」)이자 “세상에 진 빚을 갚는 것”(「한 소식」)이며, 삶과 세상의 진실을 말하는 데 “시보다 더 충분한 것은 없다”(「추분의 시」)고 역설한다. 그러한 시를 향한 자세가 어느 한가지에 몰두해본 적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어느샌가 스며들어온다.
자신을 “수직으로 선 나무”의 “곧은 언어”(「치유의 시작」)를 빌려 “자연을 쓰는 서기(書記)”(「내가 떠나는 이유」)에 비유하는 시인은 시집 말미에 이르러 ‘시인의 존재론’을 더욱 선명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세찬 물살에 굽히지 않고/거슬러 오르는 연어 같은” 존재, “속을 텅 비우고도 꼿꼿하게/푸른 잎을 피우는 대나무 같은” 존재, “폭풍이 몰아쳐도 눈바람 맞아도/홀로 푸르게 서 있는 소나무 같은” 존재, 그리하여 “불굴의 정신으로//자신에게 스스로 유배를 내리고/황무지를 찾아가는 사람”(「시인」)이 곧 ‘시인’이다. 이러한 올곧음 덕분에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에는 단정하지만 단순하지 않고, 맑지만 묽지 않은 언어의 향연이 가득하다.
오랜 고통 끝에 이룩한 득음의 경지
한국 시에 내려진 찬연한 축복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먼 길,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시의 길”(시인의 말)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 여기까지 왔다. 오랜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마음의 밑바닥에서 삭인 끝에 마침내 득음의 세계에 이르렀다.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보여준 미학적 성취는 “한국 시의 찬연한 축복이요, 우리가 그의 시를 읽는 커다란 기쁨의 원천”(해설)일 터, “스스로 빛나는 별자리”(「아름다운 진보」)에 아로새긴 순결한 “정신의 지문(指紋)”(「낱말이 나를 깨운다」)이 돌올하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길목에서 시인은 “이제부터 나에게는/시작이 필요하다”고, 그것이 “살아야 할 이유”(「치유의 시작」)라고 힘주어 말한다. “길이보다 깊이를 생각하는 새 아침”(「발자취」), 오늘도 한편의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은 가지런한 빈 종이 위에 펜촉을 올릴 것이다. 그리고는 “마음 깊이 새긴 물음표”(「시인 지망생에게」)를 조용히 훑으면서, “가진 것이 시밖에 없을 때 웃는다”(「딱 한줄」)고 여전히 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