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永久)한 ‘모더니즘’이란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는 말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시의 세계를 그 비좁은 서정의 영토에만 제한하지 말고 새로운 종류로 더 넓혀 확장할 것이나 아닐까?
『기탄잘리』와 오마르 하이얌의 시가 영국의 세기말 시인들과 끌어안고 우는 동안 인도와 근동에는 영국의 지배가 날로 굳어 갔다.
우리가 말하는 민족문학은 아무런 감상도 자기도취도 필요로 하지 않고 현실의 구체적인 역사적ㆍ사회적 제 계기에서 제기된 것이며 일면에 있어서는 특수한 사회적 내용을 가지면서 타면에 있어서 세계사적 요구의 발현이라고 하여 마땅하다.
새로운 원문비평 김기림(1908-195?) 전집은 그가 1930년부터 1950년까지 남긴 글의 원문을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하여, 일제 강점 기(1910-1945), 광복과 미군정기(1945-1948), 그리고 남ㆍ북의 분리된 정치 체제 수립과 한국전쟁 발발 시기(1948-1950)로 이어진 일련의 지역적ㆍ전지구적 과정 속에서 그의 문학과 사상의 궤적을 새롭게 그려 볼 수 있도록 한다.
전집 제1 권은 시 전집으로 그가 남긴 첫 번째 시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1930. 09. 06)로부터 마지막 시 「조국의 노래」(1950. 05. 24)에 이르는 약 278 편을 담고 있다. 시의 원문은 당시 신문과 잡지 등에 처음 발표되었던 형태 그대로를 복원한 것으로 하고, 이 를 통해 시가 담고 있는 당대의 여러 가지 언어ㆍ문학ㆍ문화적 특징이 드러나도록 한다.
이 원문비평 시 전집은 최초에 발표된 시의 원문을 기준으로 삼아 왼쪽 면에 두고, 최근 어문규정에 따라 옮긴 수정본을 오른쪽 면에 둔다. 또한 이 전집은 추후 다시 발표된 다른 판본도 함께 포함하여, 서로 다른 판본들 사이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주석은 판본들 사이의 차이점뿐만 아니라 단어의 의미 및 역사적 배경 등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시 전집은 이해 가능성과 설명 가능성을 편집 원칙 중의 하나로 삼아 신문ㆍ잡지 등에 처음 발표된 시와 추후 단행본 시집 등에 다시 발표된 시를 비교하여 각각의 오류를 최대한 수정하고 판본에 따른 의미 있는 변경 사항을 확인해 둔다. 예를 들어,
널리 알려진 시 「금붕어」의 “떡가루를 / 흰 손을” 사이엔 “뿌려 주는”이 빠져 있다. 1930년 간도대사변을 다룬 「시체의 흐름」의 “귀밑눈”은 “귀밀눈”이다. 시인 이상에 대한 애도시 「추방된 주피터」에서 “은단 와”는 “은단추와”다. 『기상도』의 중요한 전환점 인 제5 부 「올배미의 주문」의 1935, 1936년 판 마지막 행 “흰 이빨”은 1948년 판에서 “헌 이빨”로 표기되어 있다. 미군정기의 작품 으로 미국 독립기념일 축시 「자유로운 “아메리카”」의 마지막 행 “우리 모두 축배를 들자”에 이후 시집 본에서는 “또 하나 축배는 우 리들 것으로 남겨 두자”라는 한 행이 추가되어 있다.
20세기 영ㆍ미시와 영어권 시를 주로 읽어 온 엮은이로서의 한마디. 이 시 전집이 기존의 서구제국중심적 Modernism 시에 맞춰 정형 화된 김기림이 아니라 최근에 재구성되고 있는 탈-서구제국중심적 근대시 / 모더니즘 시의 영토에 비판적ㆍ창조적으로 개입할 수 있 는 김기림을 그려내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원문비평을 하며 때때로 지나칠 정도로 자세한 주석을 단 것은 김기림의 시가 보다 정확하게 외국어로 번역되어 그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지닌 김기림의 시는 “‘서정의 영토’ 너머”라는 부제 속에 담겨 있다. 김기림이 자신의 시를 “비좁은 서정의 영 토” 너머로 이끌어 가려 했던 것은, 그가 20년간의 창작 시기 마지막 즈음에 요절한 이상(李箱)을 기억하며 쓴 글에 암시했듯, 그의 중 요한 시 창작 원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이상(李箱)은 드높은 감정 때문에 극도로 뒤볶는 우리 시를 그 감정의 분별없는 투자에서 건져 내려 했던 것이었다.
아담한 온대(溫帶)가 야만한 제국주의의 유린을 받듯, 시가 소박하고 유치하고 지저분한 감정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그는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