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해설
인간 존재의 축도(縮圖)를 담은 가열한 서사들
한동일 소설집 「불 꺼진 나의 집」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보편적 진실을 중시하는 소설적 증언
한동일의 첫 소설집 「불 꺼진 나의 집」(열림원, 2024)에 실린 단편들은 인물들이 처한 난경(難境)과 그로 인한 내면적 비극성을 한결같이 담고 있다. 그의 소설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이 부조리한 인생의 국면들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우리 시대에 대한 해석과 판단을 자연스럽게 수반하면서 개인과 공동체, 실존과 역사, 말과 침묵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전망을 우회적으로 들려준다. 그 과정에서 그의 소설은 낱낱의 사실(fact)보다는 보편적 진실(truth)을 중시하면서 우리에게 한 시대의 지도(地圖)로 다가오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소설집에 담긴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는 삶의 불가피한 비극성을 총체적으로 은유하면서, 존재론적 영도(零度)에 처한 인물들을 통해 매우 중요한 소설적 증언을 수행하고 있다. 그 인물들은 가혹하고 신산한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면서 유령처럼, 낭인처럼, 피해자처럼, 주변인처럼, 육신과 영혼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들려주는 시대의 증인으로 등장한다. 개성적이고 감각적인 한동일의 문장과 호흡은 이러한 세상 모습을 전하는 데 맞춤한 유일성과 적합성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 세계 안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 보도록 하자.
2. 구체성을 담은 우리 시대의 묵시록
삶은 우연한 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예상 가능한 절차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해석과 판단을 무색하게 하는 예외적 사건들은 우리로 하여금 합리성의 덧없음과 한계를 절감하게끔 해주기도 한다. 이처럼 삶에서 이성과 탈(脫)이성의 힘은 늘 어긋나고 비껴가면서 어둑한 양면성을 형성한다. 그래서 우리는 합리성으로 현실을 논하기도 하지만 비합리적 욕망에 대해서도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아폴론적 질서와 디오니소스적 혼돈의 상호 얽힘도 삶을 신비롭게 만드는 중요한 측면이다. 한동일의 소설은 삶에 대한 합리적이고 점진적인 개선 가능성보다는 비극적 침잠 과정을 통해 한 시대의 정체성을 사유해가는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한동일 스타일’의 리얼리즘을 통해 한 시대의 묵시록을 우리에게 처연하고 강렬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인간 모독」을 읽어보자. 이 단편은 초등학교 시절 교사들로부터 가볍지 않은 폭력을 경험한 여주인공이 이제 교사가 되어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물론 그 두 가지 폭력 사이에는 학생의 교사로의 변화도 있지만, 너무도 달라진 학교 풍경도 개입해 들어온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공부 잘 하고 병약한 아이였는데, 교사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폭력성은 학년을 달리하면서 반복된다. 그런데 ‘나’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서도 또 다른 의미의 피해자가 된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위치도 달라졌는데 말이다.
학생이었던 시절의 나는 폭력의 피해자였다. 단 한 번도 그 상처를 달랠 길도 치유할 방법도 찾지 못했던 나는, 선생이 된 이후로 또다시 얻어맞았다. 선생이라는 이유로 구타했고, 선생이라는 이유로 얻어맞았다.
한 학생이 다른 아이를 때리는 광경을 목격한 후 가해 아이에게 소리를 친 순간을 계기로 ‘나’는 학부모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는다. 폭력을 휘두른 아이에 대한 징계는 없었고 ‘나’는 그 일에 대해 사과하게 된다. 이런 일도 있었다. 공개수업 때 한 아이의 짓궂음 때문에 ‘나’는 하혈을 하고 정신을 잃었다. 아이 엄마가 보내온 문자메시지에 칼날 같은 답신을 보낸 후 결국 아이 엄마에게 고소를 당한다. ‘나’는 사과와 함께 그쪽이 제시한 민사소송 청구액보다 더 큰 돈을 건네면서 사건은 종결된다. 아이들의 등대가 되고 싶었고, 선생보다는 스승이 되기를 간절하게 원했던, 자신과 결별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의 작은 액자를 들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대학 졸업식에서의 내가 보였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두 어깨와 양손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 책상 위에 던지듯 떨어뜨렸다. 한 손으로 액자를 쥔 채 뺨 위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내 등을 토닥였던 누군가의 손길처럼 눈물이 액자를 두드리기도 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액자 위의 눈물을 닦아내려 했지만, 유리는 손을 댈수록 더러워졌다. 소매를 잡아당겨 유리를 닦았다. 그사이 감정은 차츰 잦아들었다. 고개를 돌려 창에 비친 나를 바라봤다. 빨간 두 눈, 코끝과 볼 그리고 굳게 깨문 아랫입술과 턱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슬픔을 머금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쥐고 있던 액자를 힘껏 안은 뒤 사치스러운 옷이 담겨 있던 서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나와 작별했다.
책상 위에 놓인 졸업사진은 아마도 ‘나’를 ‘나’이게 하고 교사이게 했던 존재론적 기원(origin)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액자의 사진을 서랍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나’와 그렇게 작별한다. 이 서사에는 초등학교 담임들, 교장, 학부모, 무임승차 승객까지 폭력성과 이기심을 몸 안에 깊이 내장한 군상들이 출현한다. 모두 ‘나’와 적대적 대립을 이루는 ‘선악 구도’의 한 축이다. 표층적으로 보면 이 소설은 이들을 고발하는 속성을 띤다. ‘교편(敎鞭)’이라는 회초리의 은유를 지난 시절로 돌려버리는 작금의 교권 침해에 관한 소설로도 읽힌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인간’ 자체에 대한 모독으로 흘러가는 우리 시대에 대한 증언을 지향하고 있다. 거듭되는 악몽의 구조로 세상을 은유하고 있는 과정이 한동일 소설의 이러한 속성을 잘 보여준다. 그 점에서 「인간 모독」은 폭력이 편재(遍在)하는 학교 상황에 대한 사회적 고발이자, 한 시대의 가장 우울한 구체적 묵시록으로 다가오고 있다.
표제작 「불 꺼진 나의 집」은 어떠한가. 이 소설은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떠나가고 빈집에 홀로 남은 ‘나’의 기억과 상념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나’는 언젠가 카페 창가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남들도 그렇듯” 청혼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게 된다. 어렵게 가진 아이가 다운증후군으로 밝혀지자 ‘나’는 인공유산을 원했지만 아내는 반대하여 아이를 출산한다. 두 돌 지나 아이가 죽자 아내는 아이를 기억에서 지우려고 온라인 상점에 아이 용품을 판매하기로 했고, 그곳에서 그 남자를 만났고, 그가 아내를 위로하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임신과 출산 중간에 승진을 한 ‘나’는 꽃과 케이크를 사서 자축의 의미로 아내에게 가져온다. 아이를 위해 사온 것으로 믿었던 아내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당신은 한 번도 우리… 내 아이를 원한 적이 없었어.” 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 아내는 ‘나’에게 마지막 남은 “자신의 물건”을 가져가겠다고 하였고, 언제나 그랬듯 ‘나’는 불이 어둡게 꺼진 집으로 혼자 돌아간다. 그리고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아이의 방으로 들어가 본다.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스툴 하나가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는 목을 맨 채 바람에 흔들렸다. 빈방으로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깊이 배어들다, 내게 다가왔다. 모두가 빠져나간 집은 깨끗해 보였다. 나는 문을 닫았다. 거실로 돌아가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종일 내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어 마시다 만 물병을 꺼냈다. 물방울 맺힌 병을 열어 숨이 막히도록 들이켰다. 뱃속에 차가운 자갈이 가득 찼다. 마시지 못한 물이 바닥으로 시끄럽게 떨어졌다. 얼마 남지 않은 물은 싱크대에 버렸다. 나는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켜지 않은 TV를 봤다. 까만 화면 위로 내 실루엣이 가득 찼다. 그리고 내 그림자 안에 아이의 죽음이 중첩됐다. 양팔의 털이 곤두섰다. 나는 빈 화면을 보며 웃고 있었다.
떠나간 아내와 아이의 환영(幻影)이 보인다. 가로등 불빛만 가득한 빈방과 서류 가방이나 넥타이가 있는 거실은 죽음과 삶, 평온함과 분주함의 대비를 통해 이 소설의 주인공이 얼마나 본원적 의미의 사랑으로부터 먼 존재인가를 암시한다. “내 그림자 안에 아이의 죽음이 중첩”되는 순간이 그러한 쓸쓸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 소설은 언뜻 불륜과 사랑을 둘러싼 가정소설로 읽힐 것 같지만, ‘나’와 아내의 내면으로 흔들리는 인간 욕망의 투시도(透視圖)로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전체에서 굵은 글자로 처리된 두 표현 “남들도 그렇듯”과 “자신의 물건”은 ‘모두’의 것과 ‘나’만의 것을 구별해주는 기표로 보이지만, 어차피 그것들은 아이의 죽음이 ‘나’의 그림자에 중첩되듯 우리 삶에서 혼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또 하나의 폭력적 구도로 짜인 현대인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주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부품화하고 원자화하여, 한 사회의 능동적 참여자보다는 항상 혼자일 수밖에 없는 고독한 조난자가 되어간다. 한동일의 소설은 이렇게 분주하면서도 뒤안길로 밀려나버린 주변적 존재자들의 삶을 통해 고독한 조난자의 서사를 만들어간다. 때로 허무주의적이고 비극적인 내용을 품으면서,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반어적으로 강조하는 지적 모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냄새」 또한 우리 시대의 축소판으로 읽어도 좋을 소설이다. 주인공 ‘나’와 함께 살던 친구 박훈이 죽자 그의 장례를 둘러싸고 가난의 서사가 펼쳐진다. ‘나’는 박훈의 제의로 함께 살다가 박훈이 떠나고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가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다는 연락을 받는다. 박훈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들른 건물에서 맡게 된 시큼하고 역한 ‘냄새’, 건물 전체에서 진동하는 ‘악취’는 그대로 이 소설의 서사를 감각적으로 환기하고 있다. 경찰관으로부터 박훈의 유품을 건네받은 ‘나’는 박훈이 남긴 노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한다.
시인이 되고 싶었다. 바다 위에 쏟아진 6시 햇살을, 내 미문을 통해 황금의 빛으로 조형하고, 내 가난을 그 안에 실려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꿈은 배를 타고 달아났고, 나에겐 나태함만이 얼굴 위에 두 눈과 귀에 쏟아져 내렸다. 모래 안으로 발목은 깊게 박힌 채 떠나가는 그 하얀 배를 손만 뻗어 그리워했다. 꿈을 담으라는 철학가는 사라졌다. 나태함의 죄악을 이마에 새긴 비천한 사내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나의 반항은 내 꿈이 아닌 낙인 없는 자들에게 향했지만, 그들은 내 발끝에 못 박고 영혼이 되살아나는 것마저 거부했다. 그들에게 나의 탄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먼발치에 서서 황금빛 태양은 바라보지도 않고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시인과 철학가가 모두 사라져버린 세상, 미문(美文)의 욕망과 탄식이 교차하는 가난의 세월, 그리움과 비천함을 숨가쁘게 육화할 수밖에 없는 한 사내의 자조적 고백이 담긴 노트였다. 어쨌든 가족을 떠나 새롭게 재기하려던 박훈의 꿈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그의 아내는 경제 사정을 들어 ‘나’에게 남편의 장례를 부탁한다. 비용 문제로 고민하던 ‘나’는 박훈이 세 들어 살던 건물 주인으로부터 박훈의 보증금을 받는다. 경제적으로 손실만 끼치던 박훈이 죽어서 비로소 ‘나’에게 마지막 경제적 지원을 한 셈이다.
나는 장례식장 입구에 혼자 서 있었다. 뜨거운 바람이 몰려왔다. 눈을 감았다. 남자가 건네준 돈 봉투를 세게 움켜쥐자 쉽게 찌그러졌다. 그 순간 내 얼굴은 일그러졌고 빨갛게 달아올랐다. 흐르던 땀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차게 고함을 내질렀다. 건물이 흔들렸다. 언제부턴가 내 안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나’가 시종일관 맡았던 역한 냄새는 이제 건물과 방안에만 있지 않다. ‘나’의 내면으로도 들어온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 시대 저변을 이루는 이들의 가난한 생활소설이기도 하지만, 폭력의 한 변형태인 가난과 소외가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내적 상수(常數)로 존재함을 암시해준다.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우리 시대의 한 초상이 저렇게 침착하고 구체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세 편의 소설은, 프랑스 시인 랭보(A. Rimbaud)가 노래한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는 유명한 전언을 소설적으로 증언하면서, 우리 삶이 근원적으로 고통 속에 있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고통을 만들어낸 폭력들과 힘겹게 대결하면서 여전히 불모의 삶을 이어가는 이들을 담아낸다. 작가는 이 호환 불가능한 고통들에 자신의 예술적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 우울하지만 매우 구체적인 인간 욕망의 바닥이 한동일로 하여금 그 어떤 작가보다도 더 구체적이고 비타협적으로 이러한 세계를 구축하게끔 해준 것이다. 지난 시절 우리 소설이 대개 역사적, 경험적 진실의 세계를 공동체적 선(善)이라는 방향과 함께 써나감으로써 계몽적 열정을 강하게 보여주었다면, 한동일의 소설 미학은 현저하게 개별적 체험을 구체화하는 방향을 취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한 시대에 참여하게끔 하는 과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이러한 양편향의 독해를 모두 적용할 수 있는 경험, 감각, 감수성을 모두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단연 주목할 만하다. 그렇게 한동일의 소설 미학은 경험적 진실성을 최적화하면서, 경험의 구체성과 가치의 보편성을 결속한 우리 시대의 묵시록으로 단연 우뚝하다 할 것이다.
3. 현실과 꿈의 교차, 환상성의 서사
소설을 읽는 방식은 대개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소설 속 이야기에 경험적으로 동참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서사를 따라가면서 파생적 상상을 해보는 일이다. 빼어난 이야기꾼이라면 전자의 경험을 압도적으로 선사하겠지만, 내면 묘사가 많고 우의적(寓意的) 터치가 강한 작품이라면 후자의 독법(讀法)이 더 커다란 경험을 줄 것이다. 한동일은 후자의 독법을 강하게 지지하는 소설가이다. 이색적 소재와 인물을 통해, 간명하고 단단한 문장을 통해, 상처와 몰이해, 부재와 죽음의 프로세스를 치밀하게 구성해간다. 그럼으로써 우리 시대의 여러 병리적 징후와 함께 그것이 어떻게 발원하는지를 묻고 답해간다. 그의 인물들은 우연적이고 충동적이고 일상적인 욕망의 모습을 함유하면서도, 확연한 윤리적 계열체로 나눌 수 없는 복합성을 거느리고 있다. 인물들끼리 우연의 힘을 빌려 얽히고설킨 그물망이 복잡한 다발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 공간 역시 다양하게 산포되어 있는데 이러한 스케일을 가진 서사는 관계의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명멸해간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현실과 꿈의 교차를 통해 이러한 몰락의 서사를 천천히 이끌어가고 있다.
「죽음을 맞이한 방」은 M이라는 사내가 외따로운 빈집에서 죽음의 방식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내는 어린 딸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아들은 떨어져 살고 있고 M은 “완벽한 타살”을 상상하고 있다. 자살로 보이면 아들에게 조금의 보험금도 가지 못할 것이고 끝내 가족은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환상과 실제를 교차하면서 M이 빈집에서 두 남자와 대화하는 서사로 짜여 있다. 물 한 방울마저 다 말라버린 빈집에서 M은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편으로는 죽음을 향한 노력으로 자신과 싸우고 있다.
낡은 침대 안에서 M은 눈물을 흘렸다. 생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짐승의 본능이 소름끼쳤다. 애초부터 죽음을 핑계로 현실로부터 도피한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밖에서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긁어대는 소리로 바뀌기도 했다. 빈집에서는 고요한 시간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어느 것도 M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M은 이불을 덮은 채 창밖을 봤다. 달을 가둔 창틀 안으로 나무그림자가 흔들렸다. 조각난 구름 사이로 떠있는 달은 안개를 동반한 태양보다 밝았다. 빈집의 차가운 벽 위로 단풍나무 그림자가 비쳤다. 흔들리는 잎이 딸의 손으로 보였다. 바람이 거세지자 나뭇잎이 세차게 움직였다.
생에 대한 집착과 죽음으로의 도피라는 양극의 욕망을 함께 가진 M은 빈집의 차가운 기운과 사물의 그림자를 자신의 분신으로 느껴가고 있다. 그런데 그 빈집으로 어떤 남자가 들어와 M과 오랜 대화를 나누고 떠난다. 남자는 들고 있던 M의 가족사진을 불길에 던져 태워버리고, M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미련을 거두어준 남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쪽을 죽이러 왔어요.”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M은 “2층 침대에서 베개로 날 눌러주십시오. 아내가 내 딸을 죽였던 방법입니다. 나도 그렇게 죽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때 새 한 마리가 창으로 들어와 비명소리를 내자, M은 난로를 향해 새를 세차게 던진다. 남자는 문을 열고 사라진다.
남자가 떠난 후 삶에 대한 미련이 살아나던 M에게 등산객 한 사람이 다시 빈집으로 찾아온다. 그는 M에게 음식과 술을 건네는데, 이 과정에서 M은 자신의 죽음의 의지를 거두기로 한다. “돌아가면 아들을 위해 이전보다 더 충성스러운 삶을 살기로 했다. 죽은 가족들에 대한 연민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돌려주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다. 하지만 방문객도 집을 떠나고 M은 더 이상 과거의 죽음에 매몰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먼저 떠난 남자를 기다린다. 그런데 M이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발을 떼는 순간, 그의 발끝이 문턱에 닿는다.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진다. 며칠 후 신문에는 “화재로 집이 전소되었고 그 안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린다. 결국 자살이나 타살을 입증하기 어려운 화마(火魔)로 인해 M은 죽은 것이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떠난 두 남자는 현실 속 인물들일 수도 있겠고 M의 상상적 분신일 수도 있겠다. 소설 속의 시공간, 대화, 소도구들까지 작가는 꿈과 현실의 교차를 통해 담아내고 있다. M의 최후는 개인적 차원으로 보면 도피의 성취이지만, 본질적 차원으로 보면 스스로 죽음의 방식을 택할 수 없는 인간 욕망의 필연적 몰락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소송」은 소송을 진행중인 주인공 A가 겪는 심리적 억압을 역시 꿈과 현실의 교차 과정을 통해 그린 소설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카프카(F. Kafka)의 동명(同名) 소설이 있다. 서른 번째 생일날 아침 갑자기 체포된 요제프 K가 자신도 모르게 끝이 보이지 않는 소송에 휘말리게 되는 소설이다. 가장 비현실적인 상황을 통해 억압적 현실을 드러내며,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억압의 실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개인이 겪는 무력감을 담아낸 카프카의 걸작이다. 그러고 보니 한동일 소설들 가운데 이 작품은 유독 카프카의 문체를 빼닮았다. 주인공 ‘말로 A’도 ‘요제프 K’의 이름을 닮았다.
은행 국장인 A는 어떤 일로 피소가 되었는데, 행장의 권유로 그 은행과 거래하는 어느 회사의 사장을 방문하여 은행 입장을 전하는 임무를 띠게 된다. 2시간가량 떨어진 도시의 사장 저택으로 이동하던 A는 “머릿속에 소송과 오늘 해결해야 할 일”이 엇갈리는 경험을 한다. A를 기다리던 사장은 “아직 소송이 진행중인데 저를 만나도 되겠습니까?”라는 말을 건넨다. “소송은 제가 무리하게 부탁해서 벌어진 일이라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보시다시피 제 쪽은 마무리가 잘 됐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국장님 소송 건도 좋게 마무리되겠죠.”라고 하면서 말이다. 끝내 소설에서 소송의 맥락은 밝혀지지 않지만 A에게 소송이 얼마나 고통과 억압을 가져다주는지는 행간마다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행장이 건넨 말과 사장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엇갈리자 A는 모두를 의심하면서 다시 자신의 도시로 돌아온다. ‘오늘’을 복기해본 A는 “행장이 넘겨준 카드, 그 알 수 없는 드론, 자신의 전화기” 등을 모두 의심하게 된 것이다.
A의 머릿속에선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엉키고 있었다. 애써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다시 실장만의 계략이 아니라는 의혹이 살아났다. 행장을 비롯해 친구라고 믿었던 사장까지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A의 불신은 사장의 대화를 자백으로 만들었다. 사장과 있었던 일들도 모략으로 여겼다. 그리고 배회하던 드론의 주인은 사장이라고 믿었다. A의 퍼즐이 맞춰질수록 그의 의심은 확신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사장은 음모에 가담한 배신자였다. 이 생각에 도달하자 A는 자신의 소송은 패소하고야 말 거라는 좌절로 근접했다.
그는 소송에 빠져서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소설은 “A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사무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라고 함으로써 하루 동안의 일들이 모두 ‘꿈’은 아니었을까 하는 점을 환기한다. 사무실은 그대로 고요했고, 모든 것은 그대로 있었다. “A에게 어제 일은 소송 때문에 발생한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A는 다시 행장에게 가는데 거기서 경찰들과 마주치면서 “이 상황이 아직 깨지 않은 꿈이길” 바란다. A는 난간을 잡고 그 위로 올라 재빨리 몸을 돌려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몸을 일으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주차타워를 향해 그는 뛰어간다. 그렇게 이 소설은 ‘소송’이라는 억압의 구도가 현실과 꿈 모두를 지배하면서 주인공을 몰락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을 치밀하고도 강렬하게 구성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통절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그것이 역시 꿈과 현실의 교차 혹은 혼재 과정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팽팽하게 감긴 태엽」은 그 자체로 꿈의 구조를 닮은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로 가득한 소설이다. 상상 속의 행로를 눈부시게 이동해가는 ‘나’는 무수한 사람들과 순간과 장면과 사물을 만난다. 그 자체로 탐색담(Quest story) 속성을 강하게 띤 환상소설의 성격을 품고 있는데, 주인공 ‘나’는 그 과정에서 ‘알’과 ‘연꽃’과 ‘숲’과 ‘사막’을 만나고 마침내 자신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시간이 지나 내 눈이 창조물들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또다시 어딘가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집은 사라졌고 흰색 재킷을 입은 남자만이 갈대밭을 걷고 있었다. 나는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내 의도하지 않은 걸음은 남자에게로 향했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상처가 가득한 팔과 피 묻은 흰색 재킷을 입은 남자가 가까워졌다. 어느덧 내가 그 남자 바로 옆에서 원하지 않은 큰 발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처음보다 더욱 커진 알을 끌고 가던 남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왼팔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내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무엇보다 거대한, 까만 산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깊은 바다까지 품고 있는 그 산에 영원히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
여러 탐구 과정을 통해 “창조물들을 분간할 수 있게” 된 주인공은 또 어딘가를 향하여 멈출 수 없는 행로를 떠난다. 여기서 “상처가 가득한 팔과 피 묻은 흰색 재킷을 입은 남자”는 어쩌면 주인공 스스로의 초상이었을 것이다. “더욱 커진 알을 끌고 가던 남자”와 ‘나’는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거대한 산에 함께 이른 상호 분신이었던 셈이다. 한동일은 환상성 강한 행로들을 통해 주인공이 겪은 일들이 실제보다 더 구체적인 삶의 은유로 다가오게끔 배려하고 있다. 그만큼 이 소설에서 환상성은 근원적인 요소로서 내재되어 있으며 작가의 창조적 비밀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프로이트(S. Freud)는 모든 유혹의 기억이 환상의 산물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환상이 현실의 정확한 지각을 방해하지만 ‘상상의 산물’로서 새로운 현실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문학의 최초 흔적은 어린아이에게서 발견되며 아이들이야말로 자기만의 세계를 새로운 질서에 맞추어 배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성인이 된 이후 놀이는 꿈 혹은 환상으로 대체된다. 작가의 창조적 행위는 이처럼 어린 시절 놀이의 연장선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한동일 소설의 환상성은 새로운 세계에 감정을 집중시키면서 그것을 현실과 유비시키는 데서 찾아진다. 이러한 끔 혹은 환상은 결국 욕망의 성취를 선사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보정의 의지이기도 할 것이다. 「팽팽하게 감긴 태엽」은 그러한 속성을 탁월하게 그려준 득의의 소설인 셈이다.
인간은 몸과 마음을 아울러 갖춘 존재다. 몸이 시키는 욕망과 마음이 시키는 출렁임은 서로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열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한동일의 소설은 이러한 양면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인간을 통합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양면성을 불가피한 존재방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 성과 속, 꿈과 현실을 통합적으로 파악하는 중에 삶의 정체성을 확보해간다는 믿음이 소설의 저류(底流)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동일 소설을 읽는 이들은 상상적 일탈을 통해, 꿈과 현실의 불가피한 교차를 통해, 환상적 상황과 언어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생에 대해 다시 한번 실존적 자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4.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게끔 해주는 시선의 만화경(萬華鏡)
최근 우리 소설이 처해 있는 조건은 이중의 변방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여타의 대중예술 장르로부터 경원당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담론을 통해서도 홀대받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비롯한 자본주의 영상미학의 총아들에 의해 현저하게 위세가 꺾인 소설은 이제 인문학으로의 담론 확장을 요구받고 있다. 어쩌면 소설은 인간 욕망을 조율하는 기능을 가진 디오니소스적 언어행위이니만큼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는 역할을 창의적으로 해갈 수 있을 것이다. 한동일의 소설은 이러한 의제(agenda)를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확장적 속성을 가득 품고 있다. 인간 특유의 가치가 소외되고 배제된 사회적 상황을 넘어 그의 소설은 좀 더 본질적인 인간 욕망의 덧없음과 그것의 필연적 몰락 과정을 그림으로써 그러한 의제에 한층 육박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단편소설은 집중된 한 가닥의 사건이나 관념을 중심으로 사람살이의 날카로운 단면을 재현해 보여주는 문학 양식이다. 그것은 장편이 추구하는 전체성이나 서정시가 중시하는 내포성 사이에 존재하면서 양자의 성격을 동시에 아우르고 구현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빼어난 단편을 통해 역사나 이념 같은 거대담론의 정수(精髓)는 물론,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일상 국면도 경험하게 된다. 그만큼 좋은 단편은 그 안에 담긴 인생 단면을 통해 일종의 ‘내포적 전체성’에 이르는 각별한 경험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그 점에서 한동일의 이번 소설집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은 무의미한 관성의 집적으로 보이는 우리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게끔 해주는 시선의 만화경(萬華鏡)으로 훤칠하게 다가온다. 그만큼 그의 소설은 어느 제도적 형식보다도 한 시대를 징후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살아 있는 보고(寶庫)로 거듭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소설집은 그러한 도정의 첨예한 증좌가 되어주면서 그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미학적 총아로 나아가게끔 해줄 것이다.
이처럼 인간 존재의 축도(縮圖)를 개성적으로 담아낸 한동일 소설의 가열한 서사가, 주변적 존재자들을 향한 그의 섬세하고도 진중한 시선과 필력이, 앞으로도 우리 소설사에 더욱 좋은 문장과 사유를 한없이 부여해가기를 마음 깊이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