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의 시간에 서 있는 듯해도 실은 모두가 환한 달빛의 영역 아래에 있다.
이 책을 펼친 당신도 ‘달이 뜨는 동쪽’을 가볍게 걸었으면 좋겠다.
달빛이 당신을 비출 것이다.
과거는 언제부터 과거가 되는 걸까.
시간의 흐름을 기준 삼으면 모든 순간은 시시각각 과거가 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지금도 다음 문장 앞에선 곧바로 과거가 되어버리고, 눈을 깜빡이는 순간 그만큼의 과거가 새로 만들어진다.
그럼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마음에 난 물길을 다 지나간 일, 지나간 생활만을 과거라고 한다면. 그리하여 더이상 현재를 억압하지 않는 기억만을 과거라고 부른다면. 오직 그것만이 과거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때, 얼마나 많은 기억이 일순간 현재가 되어버릴까.
주얼 작가의 연작소설 『달이 뜨는 동쪽, 세상의 끝』은 두꺼운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현재는 흘려보내지 못한 과거가 중첩되어 두툼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의 구멍을 지니고 살아간다. 사춘기 시절 겪은 누나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거나(「그해 겨울 눈 덮인 해변에서」), 갑작스러운 연인과의 이별로 새로운 사랑 앞에 망설이기도 하고(「최선의 선택」), 애써 당도한 현재에 대한 의문이 지난 삶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기도 한다.(「최선의 선택」, 「파도에 몸을 맡기고」) 누군가는 늦게 알아차린 마음을 가슴 안쪽에 간직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달이 뜨는 동쪽, 세상의 끝」)
구멍은 외투 안쪽에 덮여있다. 외투를 입은 그들은 시청 공무원으로, 도시계획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으로, 카페 사장으로 잘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외투를 벗는 순간 바닥 깊은 심연이 드러난다. 소설은 그 심연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캄캄한 구멍 안에는 오래된 과거, 그러나 조금도 녹슬지 않은 생생한 과거가 흘러가지 못한 채로 고여 있다. 그것들이 모두 현재를 이룬다.
과거가 현재 안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될 때 사람들은 나름의 방법을 찾는다. 잊기 위해 애쓰기도 하고, 신에게 기대기도 한다. 여기 실린 소설 속 인물들은 직면하기를 택한다. 직면의 장소는 ‘달이 뜨는 동쪽‘, 속초다.
네 편의 소설에서 속초는 직면 이후의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그것이 일견 타당하게 느껴지는 건 바다 때문일 것이다. 균열을 품은 사람이 마침내 바다 앞에 설 때, 그 틈으로 바닷바람이 통과하면 무언가 일어난다. 가라앉거나 떠오르거나. 그것은 무한에 가닿는 경험이다.
호흡도 편안해진다. 밀물과 썰물은 들숨 날숨과도 닮아있어서, 바다에서 사람은 바다의 속도로 숨 쉬는 법을 배운다. 그러므로 삶의 어느 시기에는 바다와 마주 보는 시간이 필요해지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바다를 찾는다. “나는 바다와 결혼 한다”고 말한 카뮈처럼. 그 모든 걸 바다의 마법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달이 뜨는 동쪽, 세상의 끝』은 바다의 자기장 안에서 회복을 도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다를 품은 도시 속초에서 소설 속 인물들은 구멍 안쪽의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 올리고, 이런 말을 듣는다.
“분명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을 테고, 그러니 그건 그때 현정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아니었을까? 결과로 판단할 수는 없어요. (...) 아마 앞으로 현정씨 앞에는 계속해서 문이 나타날 거고, 그 문을 통과해야만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내 생각에 중요한 건 문을 열고 발을 내디디는 그 행위 자체인 것 같아요. 그 끝이 어딘 지가 아니라.”
「최선의 선택」
“지금도 잘하고 있어.” “오빠 탓은 아니야.”
「그해 겨울 눈 덮인 해변에서」
“저는 가출했으니까 이제 집에 안 갈 거예요. 집에 안 가고 제가 가고 싶은 데로 갈 거예요. 거기에서 계속 있을 거예요. (...) 아저씨도 가출했으니까 가고 싶은 데로 가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어떤 시절은 꼭 들어야 할 말을 들음으로 인해 건너 가진다. 그 말은 타인의 입을 통해 들려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책 속의 문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는 건 한 시절을 적극적으로 건너가겠다는 의지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 안에서 회복의 기제는 자연의 언어(바다)와 인간의 언어로 동시에 밀려온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바로 달빛이다.
네 편의 소설에서 달은 수시로 등장한다. 밤하늘에 실재하는 달로, 액자 속 사진으로, 달을 닮은 조명의 형상으로 인물들의 주위를 맴돈다. 그들을 비춘다. 삶이 캄캄할 때, 어두운 밤의 시간에 서 있는 듯해도 실은 모두가 환한 달빛의 영역 아래 있다고 말을 건다. 희미할지라도, 달은 변함없이 떠오른다고. 바로 동쪽으로부터.
『달이 뜨는 동쪽, 세상의 끝』의 계절은 모두 겨울을 그린다. 겨울은 봄을 앞두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야기 속 인물들이 맞이할 봄을 상상한다.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고 흘려보낸 그들의 봄은 전과 다를 것이다. 이 책을 펼친 당신도 현정과 하윤처럼, 지후와 연우처럼 ‘달이 뜨는 동쪽’을 가볍게 걸었으면 좋겠다. 달빛이 당신을 비출 것이다.
박은지│부비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