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력에 맞서 여성들이 이루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
표제작 「새장을 열다」는 가정폭력 피해자 사이의 연대를 담아낸 작품이다. 폭력적인 미혼부로부터 도망친 어린 화자 ‘나’와 폭력적인 아들과 함께 살던 ‘강숙’ 씨는 하나뿐인 가족이 되어 보통의 일상과 위로를 주고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강숙 씨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고 ‘나’는 혼자 남는다. ‘나’는 강숙 씨의 아들로부터 강숙 씨의 흔적과 강숙 씨와 함께 키우던 꾀꼬리를 지키기로 결심한다. ‘나’는 폭력이라는 새장을 열고 자유를 향해 날아갈 수 있을까.
나는 바람신 영등할매가 지나던 골목을 길고양이처럼 헤매고 다녔다. 강숙 씨는 나를 넙죽 안고 집으로 가서 아랫목에 묻어 두었다. 내가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살아나자 뉘 집 아이냐고 물었다.
“우리 아빠 앤데요.”
“그럼 이 할매 집 애 돼 보련?”(102쪽)
「물고기 비늘」은 오랜 시간에 걸친 엄마와 딸의 갈등과 화해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인 딸은 어릴 적 생선 장사를 하는 어머니에게서 나는 비린내 때문에 어머니를 기피하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향기에 집착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별로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남자와 이어가는 연애만이 유일하게 맺고 있는 친밀한 관계다. 그러던 중 그녀가 운영하는 네일샵 앞에서 활어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하고, 주인공은 문득 물고기 비늘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리고 어머니의 생선 냄새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 노동의 현장, 그 자리에 어긋난 채로 존재하는 사람들
「초대」의 화자는 과거 일하던 회사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후 배달 기사가 되었다. 눈이 내리는 날 장례식장으로 근조 화환을 배달하던 중 사고를 당한 그는 견인차를 타고 어떻게든 자신의 일을 끝마치려 한다. 화환의 주인공은 산재 사고로 장애를 얻은 후 자살을 선택한 근처 공단의 노동자. 돈 때문에 오직 자신의 이해에만 몰두하는 인물들의 태도는 노동자끼리 연결되지 못하게 만드는 노동 구조와 그곳의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얼음 창고」는 오래된 상가의 재건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을 묘사한다. 상가에서 얼음 장사를 해온 문 씨는 건설업자 엄 소장에 맞서 자신의 얼음 창고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과 같은 삽차의 움직임 한 번에 그의 삶의 장소는 스러지고, 그의 목소리는 힘없이 흩어질 뿐이다.
“다 끝난 일 조용히 마무리하죠.”
엄 소장이 손으로 입술을 훔치며 웃었다.
“땅, 산다고 했잖아. 불하받게 손써 줘.”
“도시 환경 해친다고.”
“누구를 위한 문, 문, 문이야!”
문 씨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빛처럼 흩어졌다.(57쪽)
▶ 가족의 죽음, 남겨진 사람들이 마주하는 애도와 작별의 과정
「비거 동해로 날다」는 괌으로 강제 징용된 아버지와 이별한 아들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어느새 팔순이 넘은 노인이 된 아들은 한국인 유해 발굴단으로부터 사이판에서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향한다. 긴 시간이 걸린 이별을 마무리하기 위함이다.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아들은 마침내 아버지의 마지막 장소를 찾고 직접 만든 비거를 날리며 아버지를 떠나보낸다.
「우리는」과 「나만의 장례식」은 아이를 잃은 부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는」의 부부는 아이의 사망 신고를 하기 위해 구청으로 향한다. 아이를 떠올리게 하는 줄무늬 고양이와 옷가게를 지나치며 부부는 슬픔에 빠지는데, 시어머니는 계속 전화를 걸어 그들을 괴롭힌다. 구청의 사망 신고 절차는 너무나도 간단하고, 부부에게는 허탈함만이 남는다.
「나만의 장례식」의 주인공은 고인의 뼛가루로 사리를 만들어주는 회사에 다닌다. 어느 날 한 부부가 아들의 골분을 들고 그곳을 찾는다. 사리와 함께 아이의 소원이었던 세계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그들의 계획을 듣고, 화자는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죽은 아이에게 제대로 된 장례식도 치러주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슬픔에 잠긴다. 그리고 그 부부와 자기 아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리라고 결심한다.
하얀 눈으로 덮인 고속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운전하는 내내 옆 좌석에 앉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곧 아버지를 볼 수 있다고, 눈 때문에 길이 막혀도 엄마는 계속 갈 수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2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