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 『눈사람 자살 사건』을 쓴 한국 현대 시문학의 거장,
최승호 시인이 펼쳐내는 경쾌하고 자유로운 말의 감각, 깊고 눈부신 생의 감각!
“세상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시와 아이의 웃음이다.” “의미에 짓눌린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싶다.”라고 말하며 최승호 시인이 아이들을 위한 시를 쓰기 시작한 뒤로 한국 동시의 세계는 다채로운 색깔로 변모했다. “우리 동시는 최승호 시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라는 이안 시인의 말처럼, 최승호 시인 이후로 억압되었던 유희 정신이 자유롭게 표출되어 다양한 시인들을 동시의 세계로 불러들였다. 『나는 그냥 고양이』는 이런 흐름을 만들어 낸 최승호 시인이 새롭게 펴낸 깊은 울림 가득한 시 그림책이다. 진정한 대가들의 작품이 그렇듯, 막힘없이 걸림돌 없이 술술 읽힌다. 어린 독자건 어른 독자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와 그림에 쑤욱 빨려 들어가 웃고 상상하고 놀라고 두근거리다가, 마지막에는 마음이 먹먹해지고 만다. 『대설주의보』 『눈사람 자살사건』 그리고 「말놀이 동시집」의 "그" 최승호 시인이 오래 어루만진 시구들 때문이다. 시인은 경쾌하고 자유로운 말의 감각과 깊고 눈부신 생의 감각이 한데 어우러진 경지를 우리 앞에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가볍게 뛰어오르는 명랑의 높이와
멀리 보는 고요의 깊이
태양계의 한 행성 지구에는 얼마나 다양한 고양이들이 살고 있는 것일까. 고양이는 그 어떤 동물보다도 개성이 강한 존재다. 자존심을 지키려 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려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모르는 내면의 신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예술가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매혹하면서 고양이는 오래도록 사랑 받아온 것이 아닐까. 포르투갈의 어느 시인은 촛불이 꺼졌을 때 고양이의 눈빛으로 시를 썼다고 한다. 최승호 시인 역시 이 시를 쓸 때 고양이의 눈과 같은 빛에 고요히 집중했으리라.
그러나 이 시 그림책만의 특별함은 이제는 거장이라 불리는 시인이 쌓아온 시간 속에서 탄생한, 시인의 자화상이자 분신과도 같은 고양이들의 세계에 있다. 한여름 눈부신 바다에서 까마득한 도시의 빌딩으로, 지극한 사랑 끝에 미라가 되었다가 "고요 한 마리"로 텅 빈 방에 앉기까지, 고양이들은 “달을 만질 수 있다면 별을 굴릴 수 있다면” “외로움을 견디면서 목마름을 견디면서” “우리 잠들지 말자 깨어 있자”라고 속삭인다. “이름을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고” “동그란 구슬 속 꽃잎 무늬” 같은 아름다운 눈빛을 하고 “흰 구름 너머 먼 하늘을” 바라만 본다.
『동시 마중』의 편집위원이기도 한 이안 시인의 추천사처럼, "고양이는 철학이자 음악이고, 놀이이자 사상이고, 농담이자 시치미다. 가볍게 뛰어오르는 명랑의 높이와 멀리 보는 고요의 깊이가 시와 그림에 함께 있"는 책이다.
햇살 그냥 좋아 냥냥, 바람 그냥 좋아 냥냥
경쾌한 리듬, 익살과 유머, 그리고 "소리글자" 가득한 고양이의 세계
최승호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시가 단순하게 하나의 의미로 귀결되는 것을 시인은 경계해야 합니다. 예술가들이 관습과 제도에 저항하는 것은 획일화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죠. 우리나라 시 교육의 문제점은 시를 자유롭게 주관적으로 음미하게 하기보다는 정답을 요구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제가 동시를 쓰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이들을 의미 중심의 교육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고정된 동시의 형식을 해체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동시에서는 말놀이, 리듬, 해학이 중요시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그냥 고양이』에도 소리와 형태의 위트를 세련되게 담은 시들이 가득 실려 있다. “냥냥/나는 그냥 고양이/그냥 살지요/햇살 그냥 좋아 냥냥/바람 그냥 좋아 냥냥”과 같은 구절이나 “샴고양이 비누/ 샤샤샤샤 샤샤샤/ 머리털 먼지 씻자/ 샤샤샤샤 샤샤샤/ 발바닥 때 씻자/ 샤샤샤샤 샤샤샤”와 같은 시구를 읽다 보면 재미난 말의 가락이 입안에 맴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언어의 재미와 감각을 배워가는 아이들은 이 책을 통해 소리글자인 한글의 가치를 더욱 잘 이해하고 흡수하게 되지 않을까?
또한 시와 완벽하게 어우러진 이갑규 작가의 그림은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선명하게 떠오르는 시 속 이미지를 가뿐하게 포착해 냈다.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색감과 군더더기 없이 적확한 표현으로 시를 뒷받침하는 그림과 어울려 표현됨으로써 『나는 그냥 고양이』는 "시 그림책"이라는 부제를 갖게 되었다.
시를 좋아하며 배우고 있는 이갑규 그림에 감탄한 최승호 시인은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어린 왕자〉가 다시 지구를 찾아온다면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고양이 한 마리만 그려줘!”
화가들은 왜 고양이를 그리는 걸까? 나는 고양이 그림을 그린 몇몇 화가들을 기억한다.
새를 잡은 고양이 (파블로 피카소), 파랑 노랑 고양이 (프란츠 마르크), 고양이와 빨간 물고기 (앙리 마티스),
파란 고양이 한 마리 (앤디 워홀), 고양이와 새 (파울 클레), 고양이와 참새 (변상벽), 나는 이 이름들 끝에
고양이 화가 〈이갑규〉라는 이름을 적고 싶다. _ 최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