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일본을 자각하고
‘동아시아’ 인민들과 연대하고자 ‘무장’을 택하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일본이 여전히 경제적, 기술적, 문화적 교류 혹은 파견이라는 이름으로 해외로 진출하여 다른 나라의 인민과 자원을 착취한다고 여겼으며, 본국에서의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추구하는 기존의 운동 역시 식민지 인민의 수탈과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고 비판했다. 더불어 일제의 자본 축적 위에서 ‘평화롭고 안전하며 풍요로운 소시민 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인민들도 제국주의자이자 침략자라고 비난한다. 이들의 이런 시각은 1960년대 들어 격화된 안보투쟁, 평화운동, 전공투 등 기존 운동에는 결여된 급진적인 시각이었다. 그들의 비난은 자기 자신에게도 닿아 있다. 홋카이도 구시로 출신인 다이도지 마사시는 자신 또한 본토에서 아이누 모시리를 침략한 침략자의 후손이라고 칭한다. 침략자의 후손인 데 대한 자기 성찰의 끝은 일본의 해외 침략을 멈추게 하는 것에 이르렀다. 지금도 다른 국가를 착취하는 가해자라는 인식, 국내의 소시민적인 운동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적 방식을 통한 착취를 멈추어야 한다는 확신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으로 하여금 ‘반일’을 외치며 동아시아 인민들과 연대하게 했다.
같은 시간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살아 온,
다이도지 마사시와 마쓰시타 류이치의 운명적인 만남
저자 마쓰시타 류이치는 1969년 《두붓집의 사계》라는 책을 통해 크게 알려졌다. 마쓰시타 류이치는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어려워진 가정 형편을 돕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가업인 두부 만드는 일을 묵묵히 해내며 자신의 일상을 담은 책을 썼다. 《두붓집의 사계》는 드라마화되면서 더 많은 주목을 받았고, 류이치는 당시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살아가는 ‘모범 청년’으로 표상되었다. 그러나 류이치는 자신을 이렇게까지 ‘모범 청년’으로 여기는 사회의 시선에 대해 불편함과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자신이 같은 시기 일본에 반기를 든 전공투에 참여한 학생들과 대조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1970년, 전공투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 류이치는 두붓집을 접고 행동하는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류이치는 일본의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와 와다 규타로에 관한 책을 연달아 집필한다. 이 책들은 급진적인 학생 운동과 폭파 사건 등에 가담해 투옥된 활동가들 사이에서 읽히기 시작했다. 그중 류이치의 자전적 성격이 강한 《두붓집의 사계》는 ‘붐’이라고 할 정도로 이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는데,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늑대’ 부대원 다이도지 마사시는 특히 이 책에 감명을 받는다. 마사시가 류이치에게 직접 편지를 쓰면서 둘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류이치는 사상자를 발생시킨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투쟁에 대해 어려움과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결국엔 자신이 이들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책무를 느낀다.
여러 시간대를 오가며 구체화되는 사건과 사람들,
그리고 한국의 오늘
마쓰시타 류이치는 직접 취재한 내용과 다이도지 마사시와의 인터뷰에 기반하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사람들과 그날들을 복원한다. 이야기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멤버들의 체포 장면으로 시작되지만, 폭파 준비 과정과 체포 직후의 장면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나 마사시와 류이치가 만나는 장면이 교차되며 구체화된다. 사건 당시의 사상적 선명함은 체포 이후의 회고와 반성과 겹쳐지고, 사건을 준비하는 멤버들의 확신은 사건이 일어난 후 그들 가족의 복잡한 심경과 겹쳐진다. 실천과 성찰, 회고와 반성이 뒤섞이는 시간대를 지나며 독자들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읽어 낼 수 있는 여러 장면들과 마주할 것이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투쟁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여전히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보다 가까이서 바라보며 함께 성찰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