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의 압도적인 규모와 문제점에 비하여, 종교는 오늘날 스스로 세속의 일부로 전락해 세속에 종속된 듯한 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종교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그 이상적인 표방에 비해 현실적으로는 종교가 오히려 세속 세계 갈등과 혐오, 살육(전쟁)의 핵심 원인이자 동력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는 세속의 다른 영역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많은 역할을, 지난 수천 년간에 비해서는 현저히 그 영향력이 위축되었지만, 나름으로 감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여전히, 종교가 없음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문제와 종교가 있음으로 해서 감쇄되는 인간 사회의 여러 문제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큰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가 하면, 현대 세계는 문명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동북아시아에서의 위기 고조, 동남아시아 해역에서의 영토분쟁 등의 갈등, 동남아시아 역내 국가 내에서의 종교 분쟁, 아랍 지역 일대의 종교 분쟁 등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도 종교계 안팎의 갈등은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일본 또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인물이 최근 전직 수상을 저격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일어나는 등, 종교가 오히려 평화로운 세계 구축의 걸림돌이 되는 경우마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평화 파괴적 행동의 원인은 다양 다기하지만, 이것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자기(종교, 국가, 종족, 이익)중심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는 자기중심주의의 가장 중요한 구심력으로 작동하는 데 최적화된 문화적 기제라는 점에서 종교가 세계 곳곳의 분쟁과 갈등의 주요 동인이 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이열치열이며 이독제독(以毒除毒)인 격으로, 종교가 가장 강조해마지 않고, 가장 주력하고 있는 가치 또한 자기중심주의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니만큼, 종교는 국내적, 국제적 갈등과 분쟁을 평화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종교와 평화 사이의 이러한 이중적 구조에 대하여 종교가 평화의 사도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이론을 구축하고, 그 현장 사례를 공유, 공감함으로써 비폭력적 평화 구축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실천을 지원하자는 취지로 한국과 일본의 종교학자 및 관계자들이 〈아시아종교평화학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창립에 즈음하여 학회가 지향하는 핵심적 과제에 대한 이론 구축과 그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해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관련 주제에 대한 학술 교류와 명사 초청 강연 등을 개최하면서 학술적 깊이를 더해 왔고, 2022년 『종교로 평화 만들기』(모시는사람들)에 이어 이번에 『평화는 왜 오지 않는가: 평화를 위한 종교적 투쟁』(한국어판, 모시는사람들)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일본어판으로도 동시에 출간되었다.(일본어판 제목: 『종교에서의 평화 구축의 원동력: 아시아에서의 사회정치적 배경을 중심으로』)
이 책은 한편으로 종교와 평화의 관계를 위시하여 평화 이론을 천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실제 평화 구축의 현장에서 종교가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중요한 사례를 소개하여 경험을 공유하는 양면의 가치를 동시에 추구한다. 실천 사례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폭력 운동, 일본의 전후 종교적 참회, 그리고 제주 4·3사건의 종교적 해석 등을 통해, 종교가 어떻게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는 평화 이론을 다루며, 이찬수, 손서정, 데라바야시 오사무 등이 종교와 평화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분석한다. 이들은 자기중심주의가 폭력의 근원이 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적 가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제2부는 양권석, 기타지마 기신, 오바타 분쇼, 안신 등이 실제 평화 구축 현장에서의 종교적 역할을 탐구한다. 이들은 파시즘과 종교의 관계, 미나마타병 운동, 제주 4·3사건 등을 통해, 종교가 어떻게 갈등 해결과 평화 구축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종교가 단순한 신앙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특히, 현재의 글로벌 위기 상황에서 종교가 어떤 방식으로 평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