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엔 늘 먹고사는 문제가 있다!
한 인간과 한 사회를 읽는 키워드, 식문화
에도시대부터 21세기 도쿄까지
30여 가지 수산물로 차려 낸
우리와 닮은 듯 다른 일본 어식 문화 이야기
언뜻 인간의 역사는 대의에 의해 움직이는 듯하다. 보통 사람과 다른 비범한 인물이나 청천벽력 같은 일대 사건, 변혁을 지향하는 이념 등에 의해 역사가 추동되고 사회가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인간의 역사는 곧 먹고사는 것의 역사다. 굳이 누군가의 명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류가 살아온 기록’이라는 역사의 의미를 곱씹어 보면, 이는 곧 자명해진다.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먹을 것인가를 둘러싼 이야기는 한낱 가볍고 말초적인 잡담거리가 아니라 한 사회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그를 통해 구성된 정체(政體)와 사회문화를 들여다보는 돋보기이자 이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렇기에 밥상을 통해 한 인간을, 한 사회를 읽어내는 식문화 이야기에는 낯섦에서 오는 설렘을 넘어 이를 이해하고 통찰하는 진지한 시선이 녹아 있다.
“식문화, 특히 물고기 등과 같은 수산물을 매개체로 일본의 단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단순한 미식 이야기가 아니라 먹거리를 통해 일본의 풍습, 문화, 역사 이야기에 초점을 두려 했다. 짜네 맵네 음식을 간 보듯 한 집단의 수천 년 식문화를 식별할 수는 없다. … (하지만) 물고기와 함께 먹고사는 장삼이사의 삶은 나라를 불문하고 닮은 구석이 많다. 그런 시선으로 일본의 물고기와 일본의 어식 문화를 그려보려 했다.” -〈프롤로그〉에서
이 책은 에도시대부터 21세기 도쿄까지 비린내와 갯내음 가득한 밥상을 통해 일본 사회를 들여다본다. 30여 가지 수산물로 요리해 낸 이야기에는 우리와 닮은 듯 다른 일본 어식 문화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수산물이 일본에서는 어떻게 소비됐는지, 정체 변화나 지역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취급됐는지, 그리고 왜 동일한 식재료를 우리와는 다른 조리법으로 요리했는지 등을 다양한 자료에 입각해 서술한다. 설익은 문화론이나 일식 찬미론으로 흐르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저자의 시선을 통해 간편식과 서구식 식단에 밀려 점차 사라지고 있는 어식 문화를 천천히 맛보고 음미할 수 있다. 비린내 추억하기. 가깝고도 먼 섬나라 일본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과거 식문화로 여행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어준다.
과거와 현재를 맛깔스럽게 버무리고
계급, 역사, 상품시장, 신앙, 언어로 맛을 낸
꼬리에 꼬리를 무는 6가지 일본 맛보기 코스
“그건 그렇고, 이제 이야기는 산으로 간다.” 이 책은 분명 수산물 이야기로 시작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꽁치, 고등어, 방어, 아귀, 새우, 오징어부터 일본 고유 음식이자 식재료인 니기리즈시, 사시미, 고래까지, 이야기의 시작은 수산물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진다. 물론 수산물과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아니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끝없이 새끼를 치며 이어진다. 가령, 아귀 이야기에서 아귀 간의 고쿠미(깊은 감칠맛)를 말하다가 미토학을 창시한 도쿠가와 미쓰쿠니와 『일본외사』를 지은 라이 산요 이야기로 빠진다든지, 꽁치 이야기를 하다가 이에신궁 참배객을 맞기 위해 개발된 독특한 생선구이 방식을 말한다든지, 전시 배급제 시대에 오징어가 배급된 이야기를 하다가 수제비가 등장한 배경을 말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무관해 보이는 것들이 저자의 해박한 수산물 지식과 재미난 입담으로 서로 얽히고설켜 씹을수록 졸깃하고 고소한 이야기가 탄생한다. 저자의 소박한 바람처럼 술자리나 식사 자리에서 가벼운 이야깃거리로 소비되기보다는 그야말로 알아두면 쓸데 있는 잡다한 지식이 알게 모르게 쌓인다.
이 책은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애잔한 서민의 맛〉은 백성들에게 수산물이 어떤 존재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2장 〈깊은 역사의 맛〉은 어패류를 통해 일본 식문화사의 단면을 들여다본다. 3장 〈쏠쏠한 돈의 맛〉에서는 상품 가치를 토대로 수산물을 살펴보고 경제 성장기의 수산물 소비 경향을 주로 다룬다. 4장 〈무사의 칼맛〉은 생선을 매개체로 무사 계급과 무사 문화를 이야기한다. 5장 〈신묘한 신성의 맛〉에서는 수산물에 얽힌 민속과 민초의 신앙생활을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 6장 〈바닷물고기 언어학〉에서는 물고기와 연관된 언어로 일본인의 식습관과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계급, 역사, 상품시장, 신앙, 언어로 맛을 내고, 과거와 현재를 골고루 버무려 낸 6가지 코스 요리에는 단순히 맛있다고 말하기엔 부족한, 진한 고쿠미가 있다.
때로는 애잔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따갑게
밥상에 비친 일본 어식 문화의 빛과 그림자
갯마을 민초의 삶을 바라보는 따뜻하고도 힘 있는 통찰
언어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일까? 언어학을 전공하고 오랜 세월 기자로 활동한 저자의 글은 말맛이 살아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산물 이야기를 다양한 감정을 갖고 따라가게 된다. “지역 토산물도 인간처럼 나고 자라는 곳을 닮는 걸까. 도호쿠의 토산물 멍게는 도호쿠의 처지를 쏙 빼닮았다.” 멍게 이야기에서는 씁쓰레한 멍게 맛처럼 씁쓸한 감정이 감돈다. “맏물을 ‘하시리’라고도 한다. 빠르게 지나간다는 뜻이다. 아차 하는 순간 떠나버리니 망설이면 놓친다. 버스 떠나고 손 흔들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랑과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가다랑어 이야기에서는 맏물을 놓칠세라 조바심이 난다. “복어는 천국의 맛이라고들 한다. 제대로 먹으면 천국에 온 듯 느끼지만, 잘못 먹으면 실제로 이 세상에 하직 인사를 고하고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극과 극을 한 몸에 지닌 생선이다.” 복어 이야기에서는 아찔함이 엄습한다. “고래 한 마리가 일곱 마을을 기쁘게 할 순 있을지 몰라도 고래 포획은 결코 녹록지 않다. … 잡히면 대박이지만, 안 잡히면 대형 손실. 고래잡이는 투기성이 농후했다. 그런 조업을 전통이니, 공동체 결속이니 하는 말로 포장하지만, 내부를 보면 잇속이 만만찮다.” 고래 이야기에서는 통쾌함이 느껴진다.
사실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의 감정은 복잡 미묘하다. 저자가 말했듯, 한일 관계는 한동안 잠잠하다가 일순 격랑이 일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초여름 바다 날씨 같다. 이런 감정의 선을 때론 섬세한, 때론 힘 있는 필치로 그려내는 저자의 글에서는 이즘이나 주의에 빠지지 않는 통찰력이 엿보인다.
“음식은 언어와 닮았다. 한 외국어가 수입되고 번역된 후 오랜 풍화작용을 거쳐 모국어화되는 과정이 음식에도 존재한다. 언어처럼 음식도 무궁무진하게 변화한다.” -〈2장. 깊은 역사의 맛〉에서
음식과 언어라는 서로 무관한 듯 보이는 인류 사회의 문화는 서로 같은 길을 걷는다. 갯마을 민초와 함께 맵고 짜고, 힘들고 고된 삶의 여정을 거쳐 온 수산물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는 저자 서영찬. 그가 언어라는 그물로 끌어 올린 일본 어식 문화에는 오랜 풍화작용을 묵묵히 견뎌 낸 장삼이사의 땀과 눈물이 짙게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