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적인 사유와 시적 아우라를 펼치는 권현숙의 두 번째 디카시집
수필가이면서 디카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권현숙 시인이 두 번째 디카시집 『알고 보면』을 도서출판 작가의 한국디카시 대표시선 18번으로 펴냈다. 첫 디카시집 『절창을 꿈꾸다』(2020년)를 펴낸 지 4년 만이다. 저자는 2007년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하였으며, 2016년 수필집 『바람 속에 들다』를 출간하여 문학나눔 세종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한 좋은 수필가이다.
이상옥(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 시인은 “권현숙 시인은 수필가로 이미 이름을 얻고서도 디지털 시대 최적화된 새로운 시의 장르로 디카시를 수용해서 누구보다 빛나는 성취를 이뤘다. 지난 해만해도 공룡 발자국 화석을 생생한 발의 말씀으로 읽고 생의 비의를 드러낸 「발자국 경전」으로 제 6회 경남고성 국제한글디카시공모전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활짝 핀 개나리꽃과 거목을 배경에 두고 쳐진 거미줄에 걸려죽은 꿀벌 한 마리의 비극적 포즈를 보며 눈치도 없는 봄날이라고, 아이러니컬한 생의 실존을 누설한 「어떤 조문」으로 제 1회 디카시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2관왕에 올랐다. 이번 디카시집은 수상작 두 편을 비롯한 「불통의 시대」, 「아이야」, 「꽃피는 슬픔」 등에서 보듯 아포리즘의 섬광을 뿜어낸다. 권현숙은 사물이라는 부싯돌을 쳐서 불꽃을 일으키는 부시 같은 시인”이라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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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은 편이다. 아직 모색기라 할 정도 아닌가 한다. 시라는 양식이 몇 백, 누천년의 시간 동안 진화해온 것에 비하면 이제 첫걸음을 내디딘 정도라고 하겠다. 디카시의 형식을 보면, 디카로 포착된 사진 이미지에 ‘언술’이라고 하는 언어표현이 결합되어 있다. 시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 ‘언술’은 언술 그 자체가 짧은 시이면서 사진 이미지와 융합해서 시와는 다른 또 다른 미학적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디카시에 쓰인 사진 또한 언술과 결합됨으로써 새로운 의미와 메시지를 구축하게 된다. 시라는 명칭이 붙었지만 앞에서 말한 이유로 디카시는 일반 시와는 다른 미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일반 시와는 변별되는 디카시 나름의 창작원리와 기법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디카시는 시가 아니라 디카시”라는 개념 규정이 가능한 것이다.
수많은 디카시가 선을 보이고 있으며 디카시의 붐이 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카시의 개념과 창작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창작하는 이가 많지 않은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디카시를 통해 시적 사유를 깊고 또 넓게 드러내면서 일관된 세계관을 보여주는 디카시인은 아직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시집 전편에 걸쳐 시인만의 독자적인 사유의 흐름과 시적 아우라를 만들어가고 있는 권현숙의 디카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새 디카시집 창작의 성취와 미학
이번에 새롭게 펴낸 권현숙 디카시집 『알고 보면』에 실릴 모든 사진 이미지는 시적 모티프를 매우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으며 언술과 결합하여 매우 적절하게 쓰이고 있다.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사진은 한눈에 보아도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집 원고에 실린 사진과 언술은 수많은 사진과 언술에서 엄격하게 가려 뽑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제외된 작품은 또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디카시에 투여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권현숙 시인이 이번 디카시집에서 이루어내는 미학적 성취와 작품에 드러난 시인의 시적 세계를 살펴보면, 이는 한 개인이 디카시의 전문 시인으로 우뚝 섰음은 물론 디카시가 프로 예술 영역으로, 본격 예술로 평가받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해준다.
시인의 작품을 보면 일상 모든 것이 디카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디카로 보고 디카로 듣고 디카로 사유하고 디카로 말하고 디카로 글을 쓴다. 권현숙 시인에게 디카는 신체 밖에 있는 신체의 일부임을 그의 작품이 증명해준다. 아예 디카렌즈를 안구에 장착하고 있는 듯하다. 허투루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도 시적인 모티프를 발견하고 그것을 한 편 한 편 디카시로 완성해내는 모습을 보면 이를 부정할 수 없다. 다가오는, 우연히 마주치는 어떤 소재를 디카로 포착하는 수동적인 자세를 넘어서 있다. 모르긴 모르되 시인은 사냥꾼에 가깝다. 비유하자면 디카시 사냥꾼이다. 숨을 쉬는 모든 순간에 디카의 셔터에 손이 가 있는 듯하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인의 철학
어떤 생을 살았든
똑같구나
온기 식은 날개의 무게
─ 「세 날개」 전문
「세 날개」에는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인의 철학이 투영되어있다. 우선 그의 철학 속에 삶과 죽음의 의미는, 이 둘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새, 나비, 모기가 등장하지만 이는 모든 생명을 환유하는 보조관념으로 쓰였다. 새나 나비나 한갓 모기와 같은 곤충이나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거꾸로 새나 나비나 모기와 같은 곤충의 생 또한 생명이라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점, 그래서 생명이라는 것은 누구에게 있어서나 그 자체로 소중하며 나아가 그 자체로 우주적 사건이기에 함부로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출한 장면이 아닐진대 우연히도 이 세 가지 날개가 한 자리에 놓여있다. 시인의 렌즈는 이를 놓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포착한 시적 모티프를 그가 가진 철학을 드러내는 객관적 상관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직관적으로 이러한 모티프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철학 없이는 작품에서 보는 것과 같은 언술이 뒤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포착된 이미지가 시인의 사유와 관련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한 시인을 특징 지을 수 있는 세계관으로 수렴해가면서 이것이 다시 사유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처럼 권현숙 시인의 세계관은 따뜻한 연민과 인간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긍정의 힘이 내재되어 있다. 때론 유머감각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삶에 대해 진중한 자세를 보여준다.
하루를 벗고 돌아가는 고단한 등 뒤로
한숨처럼 툭 터져 나오는 시간들
생생하게 남겨진 가장의 무게
─ 「헌신」 전문
사진에서 보듯이 이러한 장면을 디카시의 이미지로 포착하기 위해선 연출이 아니라면 아예 시인의 눈에 디카를 장착한 것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안전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장면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저 멀리 도로공사 현장임을 알 수 있는 플라스틱 안전 구조물, 밑창이 터진 낡은 안전화를 함께 포착한 것은 놀랍기만 하다. 길의 소실점엔 고급 승용차가 아닌 허름한 자전거 한 대가 놓여있다. 그리고 하루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듯한 사내의 뒷모습이 한 프레임 안에 포착되어있다. 사진에 담긴 모든 요소가 리얼리티를 증폭시켜준다. 여기에 이미지에 융합하고 있는 언술과 딱 맞아떨어지는 서사가 탄생한다. 디카시의 모티프가 될 수 있는 장면을 포착할 눈이 마련되어 있고 즉시적으로 그에 맞는 언술이 떠오른다. 또한 제목을 보자. ‘헌신’은 헌 신발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헌신(獻身)을 떠올리게 한다. 중의적 의미를 지난 단어가 디카시에 딱 어울린다. 이 절묘하게 포착된 순간이 제목과 그리고 언술과 융합하여 독자에게 일으키는 정서적 화학반응을 진정한 디카시의 묘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이미 시인의 마음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한 안쓰럽고 따뜻한 연민이 이러한 장면을 포착하게 했다고 할까? 숙련되고 준비된 디카시인의 경지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파고드는 작품들
쪼들린 살림 환히 필 거라더니
꿀맛 같은 날 올 거라더니
죽을 둥 살 둥 일만 하더니
눈치도 없이 환한 봄날
─ 「어떤 조문」 전문
이 작품은 소박하다고 할 수도 있는 이미지와 언술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환부를 파고들며 날카로운 시사적 문제를 환기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한 개인이 부지런히 일하고 능력껏 일하면 누구나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그리하여 사회적 계층 상승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때로 자본은 무기가 되어 약자를 착취하며 나아가 사지로 몰아넣는 경우가 있다.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는 가진 자에게 유리하게, 약자에게는 불리하게 작동하는 경우도 많다. “돈이 돈 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갔다.”고들 한다. 갈수록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사회적 양극화는 회복하기 어려운 시점까지 왔다.
작품에 사용된 이미지엔 꿀벌 한 마리가 거미줄에 포획되어 있는 장면이다. 저쪽으론 개나리꽃이 환하다. 여기서 꿀벌은 신기루 같은 희망에 부풀어 부지런히 낮밤 쉬지 않고 일하는 서민들의 모습이 은유로 나타난 것이다. 죽기 살기로 일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 갔는가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차고 넘친다. 허술한 안전장치나 아예 안전장치가 없이 안전사고로 죽어간 하청노동자 문제도 꾸준히 보도되고 있다. 저 거미줄에 포획된 꿀벌은 그러한 사회적 약자를 표징하고 있다. 꿀벌의 죽음 너머 개나리꽃 환한 풍경 저쪽은 역설적인 꿈의 현실을 환기한다. 이 작품은 이 냉혹한 자본의 희생자들에 대해 보내는 조문이라 하겠다. 사소한 풍경 속에서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까지를 읽어내는 안목이 든든하다.
이처럼 권현숙 시인의 작품에서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파고드는 작품이 많은데, 가령 「불경기」도 그 가운데 하나다. 비가 내려 거미줄에 물방울만 가득한데 그 너머로 코스모스가 드물게 피어있다. “아무리 애써도 여전한/ 안개의 날들”은 바로 불경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서민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하겠다. 물 위에 잎을 펼치고 있는 수련을 이미지로 제시한 작품도 있다. 잎 한쪽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련잎을 “마치 귀는 퇴화해버리고 입만 무성한 세상”으로 풍자하는 작품도 그 한 예다.
그런가 하면 허공에 긴 모가지를 내밀고 고개를 숙인 강아지풀을 이미지로 제시하고 “길목마다 반짝/ 더없이 깍듯하게 굽혀지는/ 허리, 허리들”이라는 언술로 선거철 선거운동원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 작품에서 ‘반짝’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목이 ‘선거철’임에 비추어볼 때 표를 얻기 위해 임시적인 친절과 겸손을 보이는 위선적 태도를 풍자한 것이다. 「낀 세대」라는 제목의 작품을 보면 커다란 나무 둥치 사이에 허리가 휘어 끼어있는 나무 둥치 하나가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다. “자식 된 도리/ 부모 된 무게 사이에서/ 숨이 찬 중년”이 언술로 뒤따른다. 나이 드신 부모님을 모시면 또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는 세대들을 그려낸 작품이다. 중년에 든 서민들의 고달픔을 그려낸 것이다. 이는 사회적 제도와 장치가 미흡한 사회와 계층의 문제로 역시 개인적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문제라고 하겠다.
작품 「어쩌라고」도 마찬가지다. 밭가에 쳐놓은 그물에 수세미 열매가 끼어 자랐다. 좁은 그물코에 허리가 잘록하게 조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시인의 언술은 이렇다. “고물가 시대/ 숨 막히는 살림살이/ 더는 졸라맬 허리도 없는데.” 가벼운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서민들의 생활고를 표현한 것이다.
디카시는 이렇게 생활 주변에서 접하는 사소한 장면에서도 시적 모티프를 포착하고 거기에 간략한 언술을 융합시켜 표현함으로써 생활예술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런가 하면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 사회의 절실한 문제에 접근하여 메시지를 만들어내고 감동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 참여적 역할도 하고 있으며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개인의 심미적 표현을 넘어 디카시의 가능성을 폭넓게 열어가고 있다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사람의 본성에 대한 인간적인 믿음
얼음장 같은 사람도
속 깊은 곳
깃털 심성 들어 있더라
─ 「알고 보면」 전문
이처럼 권현숙 시인의 디카시에 담긴 사회 참여적 메시지나 삶에 대한 통찰, 사랑의 본질적인 덕목은 모두 따뜻한 인간적 심성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디카시 「알고 보면」은 수면에 투명하게 낀 살얼음 아래 비친 깃털의 무늬를 포착한 것이다. 얼음장처럼 차갑다는 말을 쓴다. 맵찬 성정을 가진 사람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우리의 편견은 인간에 대해서 어느 일면만을 보게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속 깊은 또 다른 측면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사람을 바라보았을 때 얼음장 같은 사람도 따스한 깃털 같은 심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권현숙 시인의 작품에는 사람의 본성에 대한 인간적인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복효근 시인은 해설에서 “권현숙 시인은 매의 눈으로 평범한 사물과 풍경을 꿰뚫어 시적 모티프를 발견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끌어내는 언술은 일관되게 인간적이다. 생명 평등의 의식을 바탕으로 한 따스한 연민이 있고, 존중과 배려, 헌신과 눈물과 웃음으로 직조해가는 사랑이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따스한 신뢰가 있다”고 평한다.
권현숙 시인의 작업을 보면 동류항으로 묶일 수 있는 여러 사유가 하나의 흐름으로 수렴되어 작품 전체에 관류하고 있다. 이로써 디카시로 독특하고 고유한 자기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작품엔 무엇보다도 허투루 된 사진 이미지가 없다. 일상적 풍경 속에서 시적 모티프를 포착하는 데에 매우 뛰어난 직관이 작동하고 있음을 본다. 동시에 이 순간에 뒤따르는 사유는 그 기민성도 놀랍지만 그 사유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며 시인의 인생관, 세계관으로 수렴되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나아가 디카시를 통해 그의 사유는 확장하고 있으며 그의 디카시 작업이 그를 참된 삶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매의 눈으로 평범한 사물과 풍경을 꿰뚫어 시적 모티프를 발견”하는 권현숙 시인의 디카시 속을 유영해 보자. 그녀가 디카시를 통해 구축해가는 건강한 삶의 철학과 빛나는 사유가 보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