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기술의 활용
총 60편의 디카시를 수록한 이상옥의 이번 디카시집 『에덴의 동쪽』은 그간의 창작·이론적 성과 위에서 디카시의 새로운 전범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1부는 한국에서, 2부는 베트남에서 각각 호모 스마트포니쿠스로서 포착한 디카시다.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다양한문화적 경험을 향유하며 새로운 시선, 새로운 영감으로 디카시를 창작할 수 있게 한다. 이상옥은 이번 시집에서 두어 편의 4행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제외하고 모두 1행에서 3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디카시로 일관함으로써 디카시의 ‘극 순간성’을 몸소 실천해 보인다. 그는 디카시의 문법이 허락한 5행의 분량을 이 시집에서 단 한 번도 모두 사용한 적이 없다. 한마디로 말해 디카시엔 ‘5행도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작은’ 공간에서 그의 디카시는 어떻게 ‘가능한 한 많은’ 의미들을 담아낼까. 그가 이번에 보여준 첫 번째 전략은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기술의 활용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지상의 모든 예술은 이미 ‘레디메이드 아트(ready-made)’이다. 예술이 기존의 어떤 것의 가공이라면, 모든 예술은 이미 상호텍스트적이다. 이상옥은 디카시의 좁은 공간에 이미 풍성한 의미로 가득한 타자의 텍스트를 끌어들여 자기 텍스트의 의미를 순식간에 증폭한다.
이 시집엔 이렇게 상호텍스트성을 활용한 작품들이 많다. 거의 절반은 이런 작품이라고 보아도 된다. 이외에도 이 시집에서 이상옥이 동원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법이 있다. 그것은 생략과 함축을 통해 여백을 확보하는 기술이다. 디카시의 문자 기호는 5행 이내로 한정되어 있지만, 이상옥은 그와 같은 제한성에 위축되지 않는다. 위축되기는커녕 그는 오히려 허용된 것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말수를 줄임으로써 더욱 많은 말을 한다. ‘침묵의 웅변’이라고나 할까. 그는 말을 아낌으로써 더 큰 여백을 만들고 그 여백이 더욱 많은 의미를 생산하도록 열어 놓는다. 이런 방식은 “순간 포착”한 사진 기호에 “순간 언술”을 첨부하여 “순간 소통”을 노리는 디카시의 문법에 매우 최적화된 것이다. 눈빛만으로도 더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다면, 굳이 말을 많이 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디카시의 침묵은 디지털사진 기호와 함께 지각의 화학 반응을 일으킨다
100여 년 전 남딘 방직공장 노동자처럼
진한 국물 후루룩
뜨거운 생 후루룩
─ 「베트남 쌀국수」 전문
이 작품은 우선 더 이상 간소할 수 없이 소박한 베트남 쌀국수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미니멀리즘의 극단이라 할 이미지에 시인은 100여 년 전에도 이 음식을 먹었을 베트남 남딘 지역의 “방직공장 노동자”를 끌어들인다. 화자가 하는 일은 그저 “진한 국물”을 “후루룩” 마시면서, 그 노동자들의 “뜨거운 생”을 반추하는 것. 화자는 아마도 베트남 쌀국수를 먹는 노동자의 삶에 자신의 삶을 중첩하면서 “뜨거운 생”의 의미를 되물었을 것이다. 이 시는 그저 이런 ‘즉 순간’의 서사를 단 세 줄에 언급했을 뿐, 가타부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이 시의 수많은 의미소가 팝콘을 튀기듯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은 바로 이 침묵의 공간, 그로 인한 여백에서이다. 하이쿠의 변별적 자질이 여백의 미학에 있다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장르인 디카시도 침묵의 미학을 중시한다. 하이쿠와 달리 디카시의 침묵은 디지털 사진 기호와 함께 지각의 화학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다르다.
지구별로 오기 전 먼 머언 어느 봄날
밤의 ‘따이 학 꾸롱’을 꿈꾸듯 보며
씬 짜오, 씬 짜오라고 중얼거렸지 아마
─ 「칼뱅의 예정론」 전문
그는 한국의 창신대에서 은퇴한 후(현재 명예교수)에 메콩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는 일을 “칼뱅의 예정론”을 빌어 창세 전부터 예정된 일이라 부르고 있다. 도대체 “지구별로 오기 전” “어느 봄날”에 그가 한국말도 아닌 베트남어로 이 대학을 꿈꾸며 “씬 짜오, 씬 짜오”(영어로 “Hello, hello”)라고 중얼거렸다니, 세계에 대하여 누가 이런 애정을 가질 수 있을까.
상호텍스트성과 침묵의 미학을 통하여 디카시의 실험성을 극대화하고 있는 이상옥의 창작 비밀은 대상에 대한 이와 같은 극진한 집중과 애정에 있다. 그에게 세계는 경이 자체이다.
그는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세계를 대하고 어린아이처럼 감동한다. 그는 그가 아는 모든 지식과 지혜를 동원하여 세계를 은유하고 세계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 풍요를 살려내고자 한다.
세계의 ‘본래적 풍요’는 습관화된 지각으론 감지하지도 표현하지도 못한다. 이상옥은 습관화와 자동화가 죽인 세계의 신비를 마치 처음인 것처럼 낯설게 살려낸다. 이처럼 그의 디카시 안에서 세계는 늘 경이롭고 신선하며 풍요롭다.
이상옥 시인은 “디카시는 디지털 시대의 산물이다. 2004년 저커버그가 페이스북을 창업할 때 나는 디카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새로운 시를 실험했다. 당시 문창과 교수로서 미디어의 진화에 따라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응전이었다.”며, “이번 제4 디카시집은, 디카시가 본격문학이면서도 남녀노소 향유하는 프로슈머들의 생활문학으로서 미국·중국·캐나다·영국·독일·인도네시아·인도·베트남 등 해외에서 한글과 문화를 알리는 K-리터러처 글로벌 문화콘텐츠로도 활용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구글번역기와 챗GPT를 이용해서 직접 영어 번역을 해서 병기했다”고 고백한다.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다양한문화적 경험을 향유하며 새로운 시선, 새로운 영감으로 디카시를 창작할 수 있게 한다. 호모 스마트포니쿠스,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가는 이상옥의 네 번째 디카시집을 읽으며, 그의 철학적 사유가 담긴 경이롭고 신선한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경험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