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선율의 첫 번째 시집 『나는 존엄한 고양이올시다』가 도서출판)고몽조몽에서 출간되었다. 서사가 있는 서정시집 『나는 존엄한 고양이올시다』에는 21마리 고양이의 서사가 담겨 있다.
서사가 있는 서정시집이라고 한 것은 시 한 편 한 편에 고양이들의 삶에 대한 서사가, 그리고 그 서사에서 느낄 수 있는 서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고양이는 메이저보다는 마이너이고, 이너써클 밖에 있는 주변인이자 아웃사이더에 가깝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는 존엄한 고양이올시다”라는 선언으로 이 시집은 첫 페이지를 연다. 태어남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고,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지 역시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다. 그래서 태어남 자체가 운명이 된다.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모두 같은 처지인 것은 아니다. 금수저 집안에 태어날 수도 있고 흙수저 집안에 태어날 수도 있는데 이것 역시 ‘나’의 의지는 아닌 것이다.
‘나는 존엄한 고양이’라고 말하는 것은 누군가 고양이는 존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선언 역시 ‘어떤 인간’은 존엄하지 않다고 여기는 자들 때문에 필요하다. 그러니까 존엄하다는 선언이 필요한 ‘고양이’는 존엄을 외쳐야 하는 ‘어떤 사람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고선율의 시에서 고양이는 단지 고양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대유(代喩)이다. 모든 생명이 존엄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생명은 존엄을 주장해야만 하며 특히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유랑의 이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들고양이들은 시시때때로 존엄에 대한 위협에 직면한다.
내가 태어날 적에
고양이로 태어나겠다 선택한 것도 아니고
고양이로 태어나야지 결심한 것도 아니지만
고양이로 태어난 나는 그저 존엄한 한 마리의
고양이일 뿐이오
어두운 곳에서 더욱더 빛나는 두 눈과
아기의 살결 같은 부드러운 털을 가진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그저 존엄한 고양이일 뿐이올시다
사냥꾼의 피가 흐르니 사나울 거라
단정하지 마오
야생성이 사라졌으니 온순할 거라
안심하지도 마오
나의 삶이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질지
모르지마는 순전한 나의 의지로
오롯이 살아갈 나는
그저 한 마리의 존엄한 고양이일 뿐이니까
-「나는 존엄한 고양이올시다」 전문
이 시를 읽고 나면 고양이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갖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는 ‘존엄한 고양이’의 온전한 삶을 응원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어떤 사람들’의 삶에도 응원을 보내고 싶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선율의 시에서 고양이는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대유(代喩)이고, 생명이 있는 존재에게 삶이란 ‘살다’라는 글자 그대로의 선명한 뜻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라고 해서 사랑을 모르지 않는다.
고양이라고 해서 이별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편의점 고양이 태오」 부분
편의점 고양이 태오는 이렇게 말한다. 태오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나 고양이로 살아가는 것이나 삶에서 우리가 느끼는 기쁨 혹은 고달픔은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고양이가 단지 고양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대유(代喩)라는 말에 납득이 가능하다.
한 편 한 편의 시를 읽다 보면 드러나는 고양이의 구체적인 모습은 평범한 누군가이거나 외로운 아무이거나 마음이 가난한 ‘나’ 자신이기도 한데 이들은 대부분 생활이 고단하고 그 고단한 삶에 대한 위로가 필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어서
고양이로 태어난 고양이는 없지만
고양이로서의 삶은
고양이답게 살아가는
단단한 의지이기를 바라며
도도는 위로의 노래를 들려주곤 했다
-「고양이 도도의 항해는 멈추지 않아」 부분
도도는 혹등고래를 만나 노래를 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항해를 한다. 도도가 아무도 응원하지 않는 항해를 하는 것은 결코 들고양이로 태어난 운명을 거스르려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생명체로서 자기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은 것이다.
들고양이로 태어나 도시고양이의 삶을 선택하고
아버지로 살아가면서 위풍당당하려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사냥한 새보다 츄르를 더 좋아하는 아이들의 선호와 욕망은
먹여 살리기만 하면 되는 시절의 종말을 예고했다
-「위풍당당 고양이 만철 씨의 어부 도전기」 부분
아버지이자 가장인 만철 씨는 먹여 살리는 것 이상을 원하는 자식을 위해 참치잡이 배에 오른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붉은 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만철 씨의 삶에서는 상황의 아이러니에 불과하다.
꿈을 찾아 바다로 떠난 도도 그리고 생계를 위해 바다로 간 만철 씨는 각자 서로 다른 선택을 했지만 각자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했다. 그런데 선택의 결과는 결국 자기 자신의 몫이다. 타자의 이해를 받지 못하거나 가족의 원망을 들을 수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감내해야 한다.
도도와 만철 씨를 이상과 현실의 은유로 읽을 수도 있지만 둘 다를 현실의 한 모습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일용 씨는
털실로 짠 모자에 머리를 깊숙이 넣었다
뜨개질을 하다 눈이 마주치면
달처럼 웃어주던 사랑했던 이는
떠나고 모자만 남았다
일용 씨에게 모자는 배신을 모르는 친구
하지만 때로는
어린왕자의 금발을 떠올리는 밀밭 같은 것
평범하게 살았던
성공한 삶에 대한 기억은
모자로 남았고
달처럼 웃던 사랑에 대한 추억도
모자로 남았다
-「첫차를 타는 고양이 일용 씨」 부분
평범하게 살았던 시절이 가장 성공한 한때였던 일용 씨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아무개이다. 일용 씨의 사연 역시 삶을 살아내는 자들의 무수히 많은 사연 중 하나의 사연이다. 그리고 일용 씨에게 모자는 과거의 추억이면서 현재진행형인 그리움이고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결국 일용 씨는 모자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흔들리는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고양이들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어쩌면 자신과 닮은 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수도 있다.
궁금하지 않다고? 그건 사랑이 변한 거야!
인간이 그러면 그렇지!!!
-「고양이 해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부분
태오가 없는 덤불숲은 아무도 없는 덤불숲이구나
나비는 바람도 데려다주지 않는 태오의 냄새를 기억 속에서 꺼내며 까끌까끌한 혀를 꺼내 그루밍을 한다 혀가 지나는 자리마다 까끌까끌하다 바람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까끌까끌하다
-「고양이 나비의 쓸쓸함에 대하여」 부분
고양이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시인 고선율의 시에는, 시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서정은 물론 생활의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삶이라는 서사가 있다. 생명의 존엄함과 삶의 존엄함은 결국 같은 말이라는 사실을 고선율 시인은 고양이들의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길동주 해설, 「고양이가 존엄하면 모두가 존엄하다」에서
고선율이 스스로 고양이 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시집 〈나는 존엄한 고양이올시다〉에 등장하는 고양이들의 모습이 시인 자신의 모습과 겹치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들이 응원하지 않는 꿈을 꾸는 도도,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만철 씨,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아버지를 닮아 버린 브라우니,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햇빛과 바람뿐이라고 생각하는 레오, 사랑을 위해 꿈을 포기한 웨하스,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쓸쓸해하는 나비 등등 각자 주어진 삶을 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고양이들을 만나고 나서 우리의 삶과 존재는 모두 존엄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