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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음에

살아 있음에

  • 최혜령
  • |
  • 시와사람
  • |
  • 2024-08-25 출간
  • |
  • 144페이지
  • |
  • 125 X 200mm
  • |
  • ISBN 9788956657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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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자연과 생명의 관조와 죽음에 관한 사색
-최혜령 시집 『살아있음에』


1. 들어가며
최혜령 시인의 첫 시집 『그리운 금강산』(2021)은 자연을 질료로 시를 형상화하고 있다. 자연과 우주를 통해 시인의 심상을 그린 그의 작품들은 전통적 정서를 바탕으로 자연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이번 시집 역시 자연을 제재로 하여 상상력을 펼친 시가 대부분이다. 자연과의 교감을 시도하며 자연을 새롭게 해석하여 다양한 자연의 모습을 발견하여 시인의 정신과 하나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자연과 하나되고자 하는 세계관을 오롯하게 드러낸다.
더불어 생태학적 상상력을 노래한 시편들에서는 시인 특유의 화법으로 생명성을 탐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에서 끊임없이 자연을 관찰하고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친화력이 돋보인다. 그리고 이번 시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시적 경향은 전통음식에 대한 시인의 관심을 통해 ‘전통’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선이 새롭게 다가온다. 청국장, 젖산균, 효소, 묵은지, 무청시래기, 우거지 된장국, 누룽지, 숭늉, 수정과 등 전통음식의 숙성을 성장하는 인생으로 비유하여 삶의 깊이와 넓이로 시세계를 확장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가 몹쓸 병마와 싸우면서 병상에서 쓴 것으로 짐작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사색들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정신성이 어떠한가를 말해주는 듯하여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필자는 그의 운명 소식을 듣고 가슴이 메어왔다. 그러므로 이 글은 최혜령 시인의 영전에 바치는 헌사가 아닐 수 없다.

2.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
첫 시집 『그리운 금강산』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최혜령 시인은 사대부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을 닮았다. 절벽 위의 소나무를 “묵향 깊은/ 삶의 여백”(「여백을 위해」)처럼 기품을 지닌 선비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한국화의 모습으로 해석하고 있어 시인만의 새로운 시선을 보였다. 이번 시집에서도 피지배계급과 시인 자신의 모습으로의 오버랩, 우주와 함께 숨쉬는 초자연적인 모습, 영혼의 투사, 설화적 상상력 등 작품마다 현대적인 의미와 정서로 시인의 개성있는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다.

마음속에 연못을 담는다

싸리꽃의 흰 핏줄을 타고
조릿대 휘적신 손끝으로 두드리면

연둣빛 잎새의 현(絃)을 켜는 숲이 열린다

천년 묵은 옹이도
한(恨) 풀어 팔 뻗는 솔

수액 떨군 양수(羊水) 속
잉태된 수련은
봉우리의 달을 품는다.
- 「그리울 때」 전문

화자는 연못을 마음속에 담는다. 이때 연못은 자연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자신의 마음이 연못에 흡수됨을 뜻한다. 연못과 같은 성질을 닮고자 하는 화자의 마음이 연못에 기운다는 의미이다. 이어서 “싸리꽃의 흰 핏줄을 타고/ 조릿대 휘적신 손끝으로 두드”린다고 하는데 이 역시 싸리꽃의 핏줄을 통해 조릿대 같은 손 끝에 이입됨으로써 화자가 자연에 동화되었음을 말한다. 그러자 “연둣빛 잎새의 현(絃)을 켜는 숲이 열린다”고 한다. ‘잎새’를 현악기의 줄로 인식하는 화자의 태도가 신선하다. 이로인해 “숲이 열린다”고 하니, 화자의 손끝에 숲이 열린다고 말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마법 같다. 빼어난 상상력은 소나무의 성처이기도 한 옹이가 “한 풀어 팔 뻗는”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수련이 “봉우리의 달을 품”음으로써 자연과 자연이 일체감을 갖는다. 자연과 인간, 자연과 자연이 서로 하나가 되는 인식 태도가 놀랍다.
「맨발로」는 공룡이 살았던 백악기의 시간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들려준다.

진달래 꽃비 적신 남파랑길 한 모퉁이
공룡 발자국 찾아
맨발로 걷는다

켜켜이 쌓아 올린 암벽 틈새로 묻힌
뼈, 지층의 책장을 펼치는
상족암 기슭에 닿아
파도치는
돌웅덩이 움푹 팬 발자취 따라간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파묻히고 싹튼 화성의 씨앗들과 만나
백악기로 접어들 즈음

해식동굴 뚫는 태초의 빛이 다가와
그대 영혼 깨운다.
-「맨발로」 전문

‘상족암’은 경남 고성군 하이면에 있으며 바닷물로 깎인 해식동굴이 있다. 화자는 이곳에서 맨발로 공룡발자국을 찾아 걷는다. 자신의 몸으로 백악기의 공룡들과 온몸으로 만나고자 한다. “돌웅덩이 움푹 팬 발자취”는 공룡들이 살았던 시간과 만날 수 있는 흔적으로 “순간에서 영원으로/ 파묻히고 싹튼 화석의 씨앗들과 만나”고자 한다. 공룡이 살았던 1억 년 전후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헬 수 없는 영원과 같은 시간이어서 공룡들의 흔적을 통해 영원을 만나고자 하는 행위는 영원을 꿈꾸는 인간의 꿈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이곳에서 만난 ‘해식동굴’ 또한 영원처럼 오랜 시간의 결과이므로 화자는 “해식동굴 뚫는 태초의 빛이 다가와/ 그대 영혼 깨운다”고 함으로써 영원과 같은 시간과의 조우로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영원을 체험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그대 영혼 깨운다”고 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자연에 새겨진 백악기의 생명이 남긴 흔적인 ‘화석의 씨앗’과 오랜 시간이 만든 ‘해식동굴’과의 만나는 행위를 잠든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에서의 자연은 신성하고 영원한 불멸의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최혜령 시인의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질경이의 꿈」에서 “밟히고 또 짓밟혀도/ 이 땅 위에 시린 발자취로 남아”있다며 시련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민초의 모습으로 노래하고 있다. 「매실의 결실」에서 “내 삐친 탯줄로 연결된 모성의 은하계”라고 노래하며 ‘매실’을 ‘모성의 은하계’라고 한다. 그리고 시큼한 맛이 ‘숙성’시키는 힘이 되어 보다 성숙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계절이 「매실의 계절」이라고 한다. 「연못으로 가는 길」에서 ‘연못’을 “찰나에서 영원으로 멈춘 듯/ 동심원을 그리는 물결”이라 하여 연못의 파문을 ‘영원’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자연을 보이는대로 바라보지 않고 높은 차원의 형이상학적인 정신으로 인식하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3. 생명성 탐구
이번 시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작품 경향은 생명성 탐구의 시편들이다. 첫 시집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던 생태학적 상상력이 유독 이번 시집에서 도드라진 것은 시인의 의식 변화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인의 생명에 대한 의식이 어떤 계기를 통해 싹텄거나. 생명성과 가장 밀접한 자연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명의식이 유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생명성은 존재를 규명하는 기본적인 요소이다. 생명이 있음으로 해서 자연과 우주,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다.
최혜령 시인의 생명의식은 자연을 통해 드러난다. 특히 ‘봄’이라는 계절의 변화에 다시 생명활동하는 모습에서 발견한 생명성은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자신만의 목소리로 현현한다.

봄동이 깨어나고 있다

눈발 삼킨 겨우내,
언 땅의 가슴팍을 두드려 뿌리를 곧추고 살다
잎사귀의 실핏줄 틈새로
도랑물 풀리듯
맥박이 뛰는 소리,
잎샘이 켜는
바람 소리와 뒤섞여 굽이치다

헐벗은 배롱나무의 뿔 솟은 가지 끝 햇살 한 잎 틔운
입춘의 한나절,
텃밭 가득
날개 돋친 푸른 수액을 흔들어 기지개 켠다.
- 「봄동에게 햇살을」 전문

생명의 계절이라고 하는 봄날, 날이 따스해지자 “언 땅의 가슴팍을 두드려” “잎사귀의 실핏줄 틈새로” “백박이 뛰는 소리”가 들리고 “봄동이 깨어나고 있다”고 노래한다. 이렇듯 새싹이 새순을 피워올리는 모습을 “도랑물 풀리듯” “바람소리와 뒤섞여 굽이”친다고 한다. 때는 입춘, 아직 날씨가 쌀쌀하지만, “헐벗은 배롱나무의 뿔 솟은 가지 끝 햇살 한 잎 틔운” 한나절, “텃밭 가득/ 날개 돋친 푸른 수액을 흔들어 기지개 켠다.” 만물이 깨어나는 약동의 계절 봄의 환희를 매우 힘차게 노래한 이 작품은 단순하게 날이 풀려 새싹이 피어나고 있다는 가시적인 계절의 변화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춘하추동’이라는 자연법칙의 순환 속 존재의 뜻을 되새겨 본다는 의미를 지닌다.
「등꽃」은 보다 생명성에 대한 구체적이고 깊은 사색을 형상화하고 있다.

등나무 그늘 아래
봄비

어깨를 감싼 덩굴손의 감촉
호롱불 켜듯
눈뜨는 꽃망울로 하늘빛 창을 밝힌다

얽히고 설킨 둥치에서 길 뻗쳐 올라
구름의 둥지 튼 꽃무리 속

새벽 깨친 새소리에 온 숲이 나부낀다.
- 「등꽃」 전문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 또한 봄이다. 봄비가 내리자 “어깨를 감싼 덩굴손의 감촉/ 호롱불을 켜듯/ 눈뜨는 꽃망울로 하늘빛 창을 밝힌다”며 시인만의 감각을 선보인다. “어깨를 감싼 덩굴손의 감촉”이 특히 감각을 통해 봄을 맞는 등나무의 생태를 그려낸다. 그리고 ‘호롱불’을 ‘꽃망울’로 비유한 시각적 이미지가 더욱 등나무 꽃의 모습을 환하게 하여 이 작품의 정서를 활달하고 생기발양하게 한다. 특히 “얼키고 설킨 둥치에서 길 뻗쳐올라/ 구름의 둥지 튼 꽃무리”에 이르면 사물을 형상화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현상적인 등나무의 모습을 ‘구름의 둥지’, 등나무꽃을 비유적으로 시각화하여 매우 생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새벽 깨친 새소리에 온 숲이 나부낀다”하여 등나무의 꽃무리와 새소리가 대비되어 환호작약하는 생명성으로 변화시켜 버린다.
앞에서 살펴본 작품들은 모두 봄날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였다. 최혜령 시인의 생명시는 봄날을 시적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침샘 가득 고인 쌉싸름한 맛에/ 해묵은 세포를 깨우는 모성의 생명력”(「인간적인 맛」)으로 해석한 봄의 방가지똥을 노래하였고, “목련의 솜털 난 귓불이 붉어지는 입춘”(「맹물 맛으로」)이라고 노래한 목련꽃의 자태가 봄의 정취를 돋군다. 「보리뱅이와 춤을」에서는 온갖 봄비에 웃자란 것들과 함께 춤을 추듯 생명의 계절을 환호하는 모습을 “순간의 향연을 위해/ 청록의 숨구멍을 열어”두었다고 한다. 「냉이를 캐다가」에서 어린 시절 냉이를 캐던 봄날을 추억하는 화자는 “좁쌀냉이의 꽃대 올리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이번 시집의 시제인 「살아 있음에」는 각별하다. 시인이 타계하기 전에 부를 나누고 작품을 배치한 시집의 제목을 「살아 있음에」라고 붙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왜 시집의 제목으로 정했을까?’를 묻게 된다. 삶과 죽음이 서로 대척점에 있으면서도 삶과 죽음은 늘 등을 함께 대고 있기 때문이다. “흙과 내 몸의 체온도 뜨겁게 맞춘다”는 인간과 자연이 하나였고 동일성을 이루던 때이다. 그러므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시인은 짐작하고 있었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새순의 푸른 지느러미로 유동하는 은어떼”로 의미화된 ‘나무 이파리’ 혹은 ‘생명의 약동이 가장 활발한 때’. 그래서 “들숨날숨의 피리 소리 듣는 날” “별무리 무성한/ 태초의 하늘 숲은 열린다”고 한다. 가장 원시와 가까운 날 자연과 만날 수 있다는 화자의 소망이 투사되어 있다. 바로 그런 날 “살아 있음”에 충만하다고 한다. 자연과의 합일이 진정한 살아있음이라는 시인의 해석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도 자연 됨이 진정한 살아있음이라는 것이다.

4. 음식의 감각
한국 시사에서 100여 가지가 넘는 음식을 시 속에 등장시킨 시인으로는 단연 백석을 들 수 있다. 백석의 음식들은 그의 고향 평안도의 토속음식으로 향토적인 정서와 전통성을 투사하고 있다. 평안도 방언으로 버무린 그의 작품들은 평안도만의 고유한 지역성을 잘 발효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헤령 시인의 이번 시편에서도 수많은 음식이 등장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향토성과 전통의 정서보다는 음식이 갖고 있는 특성을 통해 인간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최혜령 시인만의 시적 세계를 발현하고 있다.

노란 살갗에 와닿는
햇살과 바람으로 익혀 거둔 알콩이네
텃밭 가득
메주콩들, 볏짚 속 둥지 틀어
서로 몸을 맞대고 뜨거운 체온으로 발효될
즈음

내 맘속에 묻어둔 구수함의 원천은
흙 내음 뒤섞인 온돌방의 체취 닮은 그대,
수천 년 뿌리내린
생의 그루터기에 걸쳐둔 구름 실타래 같은
효소의 진을 뽑아낸
고초균인가.
- 「청국장 띄우던 날」 전문

“텃밭 가득” 콩이 자라고 있다. “햇살과 바람으로 익혀 거둔 알콩이네”는 자연이 키운 콩들로 햇살과 바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볏짚 속 둥지”에서 “서로 몸을 맞대고 뜨거운 체온으로 발효”된다. 이렇게 발효된 콩으로 만든 청국장을 먹고 살아온 화자는 “내 맘속에 묻어둔 구수함의 원천은/ 흙내음 뒤섞인 온돌방의 체취 닮은” 청국장, 즉 콩이다. 우리 민족을 인정(人情)이 많은 민족이라고 한다. 이 인정을 꾸미는 정서의 하나가 ‘구수함’이다. 각 지역 사람들이 구사하는 언어마다 나름대로 구수함을 지니고 있다. 화자는 구수함의 원천을 청국장이라고 한다. 우리민족에게 청국장은 “수천년 뿌리내린/ 생의 그루터기에 걸쳐둔 구름 실타래 같은/ 효소의 진을 뽑아낸/ 고초균”이라는 시인의 해석은, 햇살과 바람이라는 자연으로 만들어진 콩, 즉 청국장의 유전자를 닮았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시인은 청국장 띄우던 날 햇살과 바람을 먹고 자란 콩이, 숙성하여 청국장이 되고 그 청국장을 먹음으로써 구수함을 지니게 되었다는 상상력을 통해 우리민족의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
다음의 「묵은지 부부」는 묵은지를 통해 맛깔스러운 부부의 인연을 묘파하고 있다.

묵은지 한 사발에 묻어나는
군내 한 입으로
곰삭은 세월의 부피를 곱씹어 본다

펼치면 텃밭 가득
포기배추 치마폭에 휩싸여
청실홍실 엮은 매듭자리 다 닳도록
버틴 목숨줄 하나

맞닿은 가슴 포개면
숙성된 시큼함으로
세포 마디마디 진액이 흐르는
둥근 항아리 속
그대와 나,
참 맛깔스러운 인연이다.
- 「묵은지 부부」 전문

설명할 수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묵은지는 깊은 맛으로 즐겨찾는 음식이다. 주지하다시피 묵은지는 군내가 난다. 그 군내는 “곰삭은 세월의 부피”에서 우려나오는 음식맛이다. 그 묵은지를 부부는 함께 먹는가보다. 이 묵은지는 텃밭에서 자라는 배추가 재료다. 그런데 “포기 배추는” “치마폭에 휩싸여/ 청실홍실 엮은 매듭자리 다 닿도록/ 버틴 목숨”이라는 것이 시인의 해석이다. ‘청실홍실’은 부부의 인연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혼례에 쓰는 남색과 붉은색의 명주실이다. 그러므로 부부가 되는 인연을 의미한다. 부부가 사랑을 하듯이, 또는 하나가 되듯이 “맞닿은 가슴 포개면/ 숙성된 시큼함으로/ 세포 마디마디 진액이 흐르는/ 둥근 항아리 속/ 그대와 나”는 “참 맛깔스러운 인연이다”라고 화자는 배추로 만든 묵은지를 통해 “곰삭은 세월의 부피”처럼 부부의 사랑도 숙성하여 맛깔스러운 인연이 된다고 한다. 묵은지라는 음식을 통해 부부의 깊은 사랑과 아름다운 인연을 노래하고 있다.
이밖에 시 속에 끌어들인 음식으로는 호박고지, 뚝배기, 누룽지, 숭늉, 수정과, 동치미 등이 있고, 음식의 재료인 무청, 미역귀, 토마토, 당근, 우엉, 콩, 팥, 파, 마늘, 생강이 있다. 이러한 음식을 통해 발효, 숙성 등이 암시하듯 성장한 인간의 모습과 음식 고유의 맛을 음미하는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젖산균 살아있다」에서는 “그대 품 안에서 숙성된 감칠맛”이라고 형상화하였고, 「한술 더」에서는 “단 하루를 살아도/ 검은 미역귀 씻긴 뜨끈한 국물에 취해/ 하늘 저편, 우러른다”라며 미역국 맛 때문에 한술 더 뜬다고 노래한다. 「무지개로 짠 한 끼」에서는 “온몸을 말려 우려낸/ 무청 시래기”를 먹는 밥상머리에 “오색무지개 떴다”고 무청 시래기를 찬하고, 「우거지에 된장 풀고」에서는 “고해의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얼큰한 국물에 회포를 푼다고 하여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운다고 한다. 「누룽지와 숭늉」에서는 “시린 가슴 녹여주는 그 맛”이라고 하여 시름을 달래주는 음식임을 노래하고 있다. 「수정과에 적신 겨울」에서는 “예순한 번째 맞이한 겨울”에 마시는 수정과에서 “햇살과 바람 속 풍화된 얼굴”을 발견하기도 한다.

5. 죽음에 대한 사색
올 봄에 최혜령 시인의 전화를 받았다. 자신의 시를 모두 버리라고 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 그리고 그는 조만간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그것이 최헤령 시인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동안 최 시인은 내게 원고를 가지고 와 보여주고 나는 원고에 첨삭을 하고 가끔 그 원고를 가지고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다가 첫 시집을 펴냈다. 늘 우수에 젖은 표정, 다소곳한 태도, 꼭 다문 입. 매우 정숙하고 예의 바른 최 시인의 모습이었다. 어디에 사는지 궁금한 것들이 있었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최 시인을 볼 때마다 마치 조선시대에 살았던 어느 사대부의 정숙한 부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그의 두 번째 시집의 작품론을 막 쓰기 시작할 때 운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필자가 이번 시집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그의 죽음과 관련한 시편들이 많다는 것이다. 시집을 받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마음이 더 아팠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쓰는 내내 안타까웠다. 이 글은 그의 영전에 바치는 헌사가 되어버렸다. 죽음에 관한 시인의 의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글들을 통해 미처 헤아리지 못한 시인의 생각들을 짐작해 본다.

구절초 흐드러진 백골의 능선을 끼고 돌아
질퍽한 안개에 휩싸인 무등골
찻집에 앉아
오롯이 홀로 남은 황톳빛
마지막 잎새 위에 유서 한 장 적는다

무등의 품 안에 깃든
평화와 고요 속에서
대추씨만한 온기로 사위어갈 목숨조차
그저 감사라고.
- 「유서 한 장」 전문

최혜령 시인은 시를 통해 유서를 썼다. “질퍽한 안개에 휩싸인 무등골/ 찻집에 앉아” “마지막 잎새 위에 유서 한 장 적는다”. 그의 유서는 너무나 간명했다. 구차하게 길게 쓰지 않고 “대추씨만한 온기로 사위어갈 목숨조차/ 그저 감사라고” 적었을 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누가 유서에 남기겠는가. 아직 더 살아도 될 푸르디 푸른 목숨이거늘. 죽는 것이 원통할 뿐일텐데, 이런 그가 슬프다. 아니 아름답다. 그의 삶을 온전하게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다. 자신을 호수에 뿌려주라는 마음이 이해가 될 것 같다. 자연으로 다시 되돌리고자 하는 그의 의식이 너무나 아름다워 슬프다. 홀로 찻집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렇듯 간명한 유서 한 장을 남긴 시인의 영혼이 불멸할 것이라는 생각 뿐이다.
「버드나무가 서 있는 풍경」은 매우 서정적인 풍경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배경에 아름다운 죽음이 있다.

내장호 끄트머리에 발을 담그고 서면
무릎까지 출렁대는 윤슬, 옹이진
물렁뼈 사이 실핏줄의 나이테를 타고
무반주 첼로의 파장 같은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겨우내,

시커먼 뿔의 가지를 드러낸 채
버들개지의 겨울눈을 감추고 죽던 날

임종의 순간을 지킨 유일한 벗,
까마귀의 문양을 새길 묘비명을 위해

어느 눈부신 봄날
뿌리 깊은 한 그루
나무 화석이 되었다

우듬지의 둥지에 꽂을 드높은 자유를 위해.
- 「버드나무가 서 있는 풍경」 전문

화자는 “내장호 끄트머리에 발을 담그고 서” 있다. 내장호에서 화자이기도 한 시인은 “시커먼 뿔의 가지를 드러낸 채/ 버들개지”가 겨울눈을 감추고 죽던 날을 떠올린다. 버들개지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벗인 “까마귀의 문양을 새길 묘비명을 위해” 봄날 “뿌리 깊은 한 그루/ 나무화석이 되었다”. 버들개지의 죽음은 “우듬지의 둥지에 꽂을 드높은 자유를 위”한 희생이었다. 죽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낳는 위대한 희생을 노래한 이 작품은 보다 의미 있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시인의 죽음에 관한 건강한 의식을 보여준다.
죽음을 암시하고 있거나 죽음을 직접 노래한, 이를테면 최혜령 시인의 죽음에 관한 의식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작품으로는 「매미의 하루」가 있다. 탈피를 통해 매미가 옷을 벗는 일은 “부활의 날갯짓”으로 승화시키는 일이다. 「죽음을 위해」에서는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 “삶과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말하며 “흙, 물, 바람의 경게를 넘어 무한한 공간의 자유 속으로” 들어간다는 인식태도를 드러낸다. 「녹음 속에 잠기다」에서는 녹음을 바라보는 시인의 의식이 깃들어 있는데, “내 깃 푸른 영혼이 죽음의 적막을 밟고”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목차

살아 있음에 / 차례


시인의 말 · 5


제1부 내가 너에게 장미꽃을 부친다
14 오미자꽃 필 무렵
15 꽃샘
16 까치샘
17 민들레 홑씨되어
18 그리울 때
19 등꽃
20 제비꽃
21 풀꽃 품다
22 텃밭에 앉아
23 달개비의 꿈
24 머위에게


제2부 내장산에서 보낸 한철
26 내장산에서 보낸 한철
십오야 27
아궁이 속으로 28
소금 29
덖음 30
따개비 연가 31
쪽배 연가 32
별이 되기 위해 33
수평선 바라보기 34
한 그루 소나무라면 35
거꾸로 본 불꽃놀이 36
한 바퀴 돌아 37
구절초 필 무렵 38


제3부 징검다리 건너
징검다리 건너 40
섬과 섬 사이 달리다 41
베풂 42
발효 43
사랑했던 기억으로 44
게발선인장 핀 겨울나기 45
46 개기월식 보다가
47 한 편 더
48 석양 그리다
49 눈보라 치다
50 달무리진 바다
51 관매도 바라보기


제4부 맹물 맛으로
54 맹물 맛으로
55 대추
56 겨울 나무
57 무등산 1
58 무등산 2
59 무등산 3
60 무등산 4
61 무등산 5
62 탈을 벗고
63 인간적인 맛
64 맨발로

제5부 살아 있음에
살아 있음에 66
질경이의 꿈 67
돌탑 쌓기 68
호흡 맞추기 69
댓잎차에 적신 하루 70
오디의 계절 71
매실의 계절 72
오행초의 하루 73
하지 너머 텃밭에서 74


제6부 섬진강 저편
섬진강 저편 76
바다 77
은행 줍다가 78
상수리 한 알 79
상강과 입동 사이 거닐다 80
눈발이 휘날리듯 81
그대 안의 우주 82
83 소등섬 할매의 꿈
84 비움
85 버드나무가 서 있는 풍경


제7부 봄이라는 이름으로
88 봄이라는 이름으로
89 냉이 캐다가
90 뽀리뱅이와 춤을
91 청국장 띄우던 날
92 오월의 첫째 날 숲을 그리다
93 젖산균 살아있다
94 묵은지 부부
95 한 술 더
96 무지개로 짠 한 끼


제8부 매미의 하루
98 매미의 하루
99 장마 끝자락
상사화 필 무렵 100
바다가 보이는 찻집에서 101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 102
감자의 눈 103
말바우 장터 가는 길 104
유서 한 장 105
호젓한 길 106
연못으로 가는 길 107


제9부 우거지에 된장 풀고
우거지에 된장 풀고 110
누룽지와 숭늉 111
수정과에 적신 겨울 112
봄동에게 햇살을 113
욕지도에 닿아 114
해금강에 가다 115
사과를 닮다 116
봄, 빗속에서 117
죽음을 위해 118
오늘이라는 하루 119
제10부 녹음 속에 잠기다
122 녹음 속에 잠기다
123 말바우 떡집 지날 때
124 다시 시작하자, 천년의 사랑
125 느티나무


작품론
126 자연과 생명의 관조와 죽음에 관한 사색 / 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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