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또 만나자고 전해주세요.”
끝내 불 켜지지 않을 것 같은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온 고양이 한 마리
소설집 《유령의 마음으로》 《초록은 어디에나》를 발표하고, 2023년 김유정작가상을 수상한 작가 임선우의 《0000》이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 위픽으로 출간되었다. 《0000》은 “잃어버린 것들을 그리워하거나 슬퍼할 감정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87쪽)의 주인공을 상상하며 시작된 소설이다. 소설은 “통장 잔고 0, 인간관계 0, 행동반경 0킬로미터, 메신저 알림 0”(59쪽)인 주인공의 외롭고도 고요한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온통 회색인 낯선 지하실에서 눈을 뜬 ‘나’는 이승과 저승의 중간 지대로 나를 납치한 검은 고양이와 만난다. 길고양이들의 안전한 삶을 위해 활동하는 특수요원 고양이 ‘오후’는 나에게 ‘존재감을 없애는 비결’을 알려달라고 제안한다. 오후는 “너만큼 존재감 없는 인간은 발견하지 못했”(18쪽)다며, 어떻게 하면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배우고자 한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텔레비전을 끄고, 방 안에 있으면 들어와서 불을 끌”(37쪽)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했던 나는 오후의 제안을 듣고 생각에 잠긴다.
어린 시절 기 수련원에서 배웠던 기의 공 만들기, 벤치나 가로등처럼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42쪽) 적막함을 가진 사물이 되기. 오후와 나는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고양이를 고양이이게 하는 모든 것을 비워내는 연습을 한다. 오후와 나는 서로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내 결론을 내린다.
스스로 아픈 줄도 모른 채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던 나는 예고 없이 뛰어들어오는 바깥의 환상을 맞닥뜨리고, “자유롭고 어디로든 갈 수”(71쪽)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그들은 “다음에 또 만나자”(76쪽)는 인사를 건넨 뒤 뚜벅뚜벅 걸어 눈부신 빛의 방향으로 사라진다.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
위즈덤하우스는 2022년 11월부터 단편소설 연재 프로젝트 ‘위클리 픽션’을 통해 오늘 한국문학의 가장 다양한 모습, 가장 새로운 이야기를 일주일에 한 편씩 소개하고 있다. 구병모 〈파쇄〉, 조예은 〈만조를 기다리며〉, 안담 〈소녀는 따로 자란다〉, 최진영 〈오로라〉 등 1년 동안 50편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위픽 시리즈는 이렇게 연재를 마친 소설들을 순차적으로 출간하며, 이때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한데 묶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단 한 편’의 단편만으로 책을 구성하는 이례적인 시도를 통해 독자들에게 한 편 한 편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위픽은 소재나 형식 등 그 어떤 기준과 구분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단 한 편의 이야기’라는 완결성에 주목한다. 소설가뿐만 아니라 논픽션 작가, 시인, 청소년문학 작가 등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장르와 경계를 허물며 이야기의 가능성과 재미를 확장한다.
시즌 1 50편에 이어 시즌 2는 더욱 새로운 작가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시즌 2에는 강화길, 임선우, 단요, 정보라, 김보영, 이미상, 김기태, 김화진, 정이현, 임솔아, 황정은 작가 등이 함께한다. 또한 시즌 2에는 작가 인터뷰를 수록하여 작품 안팎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1년 50가지 이야기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위픽 시리즈 소개∥
위픽은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입니다.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이 작은 조각이 당신의 세계를 넓혀줄 새로운 한 조각이 되기를, 작은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당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당신의 가슴에 깊이 새겨질 한 조각의 문학이 되기를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