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하고 전업 작가로 시 창작에 매진하고 있는 하재일 시인이 여덟 번째 시집 『모과는 달다』(달아실 刊)를 펴냈다. 달아실시선 81번으로 나왔다.
“독자와 소통하는 시, 독자에게 울림을 주는 시, 무엇보다 우리말의 성격에 맞는 아름다움을 잘 살린 시를 쓰고 싶다”는 하재일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이번 시집을 펴낸 소감을 이렇게 적고 있다.
“오늘도 거리에 수많은 꽃이 져서/ 지상에 수북이 쌓이고 있다// 꽃은 나무에 붙어 있을 때가 생명,/ 한순간 땅에 떨어지면 빛 바랜 종이// 새벽 골목길을 걷고 있노라면/ 흰머리 성성한 노파가/ 꽃잎을 빗자루로 쓸어내고 있다// 나는 풍경을 오려내어 액자에 담았다”
그러니까 이번 시집은 시인의 말대로라면, 지난 수년간 시인이 걸었던 공간-시간-사람-삶의 풍경을 시인의 시선(세상을 대하는 태도 혹은 철학일 수도 있고, 세계관일 수도 있겠다)으로 담아낸 것일 테다.
한편, 시인이기도 한 박성현 문학평론가는 이번 시집 『모과는 달다』를 한마디로 “연꽃처럼 피어나는 고통, 그 연두의 에스프리”라고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한다.
“하재일 시인의 이번 시집은 이 관계-맺기의 충만함에 대한 기록이자 함축적인 보고다. 그는 거의 모든 시편에서 이 ‘충만함’을 노래하고 있는데, 대상이 자기 자신으로 향했어도 관계에 대한 파고듦은 변하지 않는다. 시인에게 ‘나’는 언제든 갱신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나’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의 불연속적인 지속은 누구도 돌보지 않을 때, 이를테면 「모과는 달다」처럼 ‘아무도 안부를 묻지 않을 때’도 여전히 펼쳐지는데, ‘나는 스스로 땅에 떨어져 썩’으면서도 ‘간신히 살아나 향기’를 내며, ‘울퉁불퉁한 세상에 속이 상해도/ 손 내밀어 당신을 맞이’한다.
이와 더불어 그의 관계-맺기의 범위는 역사적 인물들을 비롯해 보이지 않은 존재-도깨비, 유령 등-로 확장된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시인은 「옴팡집」이라는 독특한 작품에서 도깨비와의 싸움을 이야기-시의 형태로 술회하는데 느티나무나 미루나무보다 키가 더 컸던 ‘도깨비’를 이기기 위해서는 묘하게도 ‘도깨비를 만나면 오른쪽이 아니라/ 허리를 잡고 왼쪽으로 넘어뜨려야 한단다/ 오직 한 방향으로 힘을 써야만 한다’고 쓴다. 그는 ‘가늠할 길 없는 안개가 끼어야 하고/ 삼경이 지난 고갯길에서 만나면 좋겠다/ 장터에서 술 한잔 걸치면 더욱 좋겠다’고 의뭉스럽게 풀어놓기도 하는데, 그것도 ‘도깨비’에 대한 시인의 예우다.
이처럼 시인에게 ‘관계-맺기’란 감각의 확장이고 사유의 집중이다. 그가 받아들인 세계의 사소하면서도 기막힌 사건들은 모두 이 영역으로 포진되는바, 이때 그는 그 풍경을 일정한 형식으로 분절하면서 우리가 ‘도약의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는 자신만의 오롯한 작시법(作詩法)을 완성해나간다.”
“하재일 시인이 다루는 문장에는 과장이나 작위적인 과잉이 없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곳곳에서 산출되는 낯선 휴지(休止)-가령, 일상어의 지나친 사용과 같은-는, 그의 문장이 파고들었던 현실 감각과 사유의 자연스러운 흔적이다. 우리가 시인의 문장에서 듣는 소담하고 친근한 목소리는 그가 경험한 생활과 실존의 단호한 편린(片鱗)이며 그 반경에서 최대치로 출렁거리는 빛의 더미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마치 내가 겪었던 일들 같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는데, 그만큼 이야기를 시적으로 풀어놓는 힘이 강하다는 반증이다.
그리하여, 시인 특유의 알레고리는 계속된다. 단지 이야기를 삽입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이끄는 알레고리 자체가 되기도 한다. 변신의 모티프가 작품의 심지에 장착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그가 활용하는 세 번째 작시법이며, ‘-되기’라는 욕망의 환유에서 출발하여 의인화로부터, 변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요약하자면, 하재일의 시는 나와 타자와의 ‘관계-맺기’로 향하고(열려) 있으며, ‘언어의 도약’ 혹은 ‘도약의 상상력’ 그리고 ‘알레고리(우화)’를 통해 ‘관계-맺기’의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내며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일 테다.
나는 동방에서 온 아라한도 아니고
삿갓 쓴 선지자는 더욱 아니다
문득 바닥을 기는 자벌레일 뿐이다
코코넛 야자수 달콤한 물방울에
허기를 잠재우며 단어를 읽는다
벽마다 기둥마다 개미가 새긴
기호가 넘쳐흘러 나무가 숨을 쉰다
어떤 놈은 라오스어를 말하고
어떤 개미는 산스크리트어를 말하고
몽골어를, 태국어를 연달아 말하며
끝없이 몰려오는 개미 떼의 행렬
내가 얻은 모국어로 즉시 응대해도
붉은 낱말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의자가 만든 각진 절벽을 오른다
미끄러지고 다시 아래로 추락하고
개미는 오직 한 문장만을 끌고 간다
소리를 잊은 채 불빛을 뒤로 하고
잠언箴言을 찾을 요량으로 간다
개미는 나를, 지금 몇 단어로 읽을까?
나라는 벌레가 자리를 뜰 때까지
개미들의 문장 연습은 계속된다
다라니가 다라니를 물고 가는 길이다
- 「개미의 문장 연습」 전문
하재일 시인은 끊임없이 이 동네, 저 동네, 세상의 모든 동네를 걷는 사람이다. 동네마다 각각의 삶이 있고 각각의 시간이 있고 각각의 장소가 있을 테다. 그러한 동네를 산보하면서 하재일 시인은 타자와의 소통을 줄곧 그려왔다. 동네마다 어떤 시간을 살아내고 어떤 공간을 살아내고 있는지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세계를 지금 관통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재일 시집을 읽는 재미라고 하겠다.
■ 달아실출판사는…
달아실은 달의 계곡(月谷)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입니다. “달아실출판사”는 인문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종합출판사입니다. 어둠을 비추는 달빛 같은 책을 만들겠습니다. 달빛이 천 개의 강을 비추듯, 책으로 세상을 비추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