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아리가 터져본 적 없는 사람은 공부를 논하지 말라”
선비들이 걸었던 가혹한 입시 외길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고, 따라서 신분마다 따르고 지켜야 할 도리가 있었다. 지배층인 양반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랫사람을 부리고 지도할 권세를 누리려면 그에 걸맞은 ‘자격’을 갖춰야 했다. 그 자격이란 첫째는 혈통이요, 둘째는 벼슬이니, 고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양반에 불과했다. 물론 벼슬길에 올라야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되었다. 이러한 신분제의 질서와 현실의 압박을 배경으로 과거를 둘러싼 입시 전쟁이 막을 열었다.
문제는 과거 공부의 난도가 상상을 초월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오늘날의 입시 세태를 보며 ‘지옥’이라고 하는데, 이에 빗대면 조선의 입시는 ‘불지옥’이었다. 일단 공부량부터 어마어마했다. 본격적인 과거 공부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소학》 《대학》과 함께 본 《자치통감》만 294권에 달했다. 요약본도 50권을 넘었으니, 다시 강조하건대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과거를 준비하며 읽는 책만 1000권 이상이라, 이것들을 모조리 머릿속에 욱여넣으려면 10회독이 아니라, 100회독, 1000회독이 필수였다(27, 52쪽). 실제로 조선 중기의 선비 김득신(金得臣)은 《사기》 〈백이열전〉만 1억 3000번을 읽었다(58쪽).
단순히 외우기만 한다고 과거를 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암기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여기에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밝히는 논술 실력이 더해져야 했다. 심지어 과거는 문체와 필체까지 평가했으니,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산업혁명 전으로 종이도 비쌀 때라, 한석봉은 붓에 물을 적셔 글쓰기 연습을 했다(64쪽). 이런 이유로 과거 공부는 최소 10년을 내다봐야 했고, 20~30년 만에 급제해도 인재 소리를 들었다.
웬만한 천재가 아니고서야 이런 고행이 즐거울 리 없었다. 보통 과거 공부는 10세 때부터 시작했는데, 한창 뛰어놀 때의 아이를 책상 앞에 앉혀놓기 위해 부모들은 쉬지 않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학문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고향의 아들들에게 하루가 멀다고 학업 성취도를 묻고, 갈구는 편지를 보냈다(33~34, 160쪽). 이황은 한술 더 떴는데, 제자들에게는 입시(과거 공부) 대신 진정한 학문의 길을 걸으라며 설교해놓고는 아들과 손자에게는 어떻게든 과거에 급제하라며 성화를 부렸다(153~158쪽).
저자는 그나마 말로 끝낸 이들이 양반이었다고 평한다. 사실 대부분의 부모가 회초리를 들었다. 그러면서 사용한 단어가 ‘지도편달’로, 이때 ‘편달’의 뜻이 바로 ‘회초리질’이다(163~167쪽). 이처럼 ‘사랑의 매’는 역사가 깊은데, 사랑이 아니라 자기 욕심 때문에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가 있어 문제였다. 관련해 사도세자를 미치게 만든 영조가 유명하지만, 이 분야의 ‘다크호스’로 조선 중기의 문신 이문건(李文楗)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직접 아들과 손자를 가르치며 묶어놓고 때리거나 코에 물을 들이붓는 등 심하게 학대했다(138~141쪽). 당시에 이런 부모를 ‘알묘(揠苗)’라고 불렀는데, ‘싹을 뽑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급한 마음에 닦달하다가 아이의 가능성을 뭉개버렸다는 것이니,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135~137쪽). 실제로 이문건의 아들은 일찍 죽고, 손자는 삐뚤어져 알코올의존증에 빠져버렸은즉, 의미심장하다.
“천민이 선비를 가르치다”
불황을 몰랐던 사교육 시장
이처럼 교육열이 뜨거웠기에, 조선의 사교육 시장은 언제나 활황이었다. 저자는 조선의 사교육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김홍도의 〈서당〉 같은 풍경과 사뭇 달랐다고 설명한다. 놀랍게도 규모와 체계를 갖춘 프랜차이즈 학원이 그때 이미 성행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평안도 선비들이 그 덕을 크게 보았는데, 변방 취급당하며 공부할 여건을 갖추지 못한 지역에 학원이 생기자 상황이 달라졌다. 학원 원장은 인조 때의 문인 맹세형(孟世衡)으로 과거에서 차석을 차지한 인재였다. 평양 근처의 작은 고을을 다스리게 된 그는 지역의 총명한 젊은 선비들을 모아놓고 자기 방식대로 가르쳤다. 이것이 시초가 되어 비슷한 커리큘럼을 따르는 학원들이 평안도 곳곳에 들어섰다. 그 결과 과거 급제자의 20퍼센트가 평안도에서 나오게 되었다(320~321쪽).
한편 한양에서는 성균관 바로 옆에 대형 학원이 들어섰는데, 원장 정학수(鄭學洙)의 신분이 무려 천민이었다. 그 학생만 100여 명에 달했으니, 공부만 잘 가르쳐준다면 사농공상의 질서를 숭상한 조선에서조차 신분은 문제가 아니었다(204~205쪽). 그만큼 과거 급제에 절실했던 것인데, 특히 장수생들의 열의가 대단했다. 오늘날에도 각종 고시에 수십 년을 쏟아붓는 사람들이 있지만, 조선의 장수생들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말 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공부한 이들이 있었다면, 믿겠는가? 성종 때의 선비 김효흥(金孝興)은 76세의 나이로, 고종 때의 선비 박문규(朴文逵)는 83세의 나이로, 철종 때의 선비 김재봉(金在琫)은 무려 90세의 나이로 급제했다(295~298쪽). 이 중 김효흥은 급제한 이듬해에 숨을 거두었으니, 아무런 여한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학원보다 일반적인 것은 과외, 그것도 선생을 집으로 모시는 입주 과외였다. 당시에는 이들 선생을 ‘숙사(塾師)’라 불렀는데, 인지도에 따라 대우가 천차만별이었다.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지역의 유력 가문들은 그를 숙사로 모시고자 난리였다. 결국 정약용의 외가인 해남윤씨 가문이 자신들의 별장을 내주는 승부수로 뜻을 이뤘으니, 그곳이 바로 다산초당이다(182~183쪽). 반면에 실력은 의심스럽지만, 학생을 잘 만나 이름을 남긴 숙사도 있었다. 경복궁에서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을 가르친 이수(李隨)가 대표적인데, 실록에 따르면 술을 끔찍이 좋아했다고 한다. 결국 술에 취한 채 말을 타다가 떨어져 죽었은즉, 충녕대군을 가르칠 때도 제정신은 아니었을 테다(96쪽).
이러한 입주 과외는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경험했을 정도로 흔했는데, 레드 오션이 된 입주 과외 시장에서 틈새를 노리고자 ‘족집게 과외’라는 것도 생겨났다. 말 그대로 과거 직전에 출제 예상 문제만 콕 집어주는 과외로 인기가 높았다(204~205쪽). 이처럼 조선의 사교육 시장은 불황을 모르며 끊임없이 진화했으니, 어쩌면 오늘날의 입시 세태도 그 연장선에 있는지 모른다.
“지금 반드시 나라를 망칠 것은 과거입니다”
백년지대계의 붕괴 과정
물론 사교육을 받는다고 무조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는 기본적으로 난도가 매우 높은 시험이었다. 장원급제를 아홉 번이나 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린 이이조차 과거 공부가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을 정도다(61쪽). 하여 많은 사람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은근슬쩍 과거를 포기했다. 그때쯤이면 채근하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기 아들에게 과거 볼 기회를 양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평범한 집안이라면, 단 한 명의 과거 공부를 뒷바라지하는 것도 벅찼다. 공부 기간만 기본 10년이요, 그간의 학원비와 과외비, 과거 보러 한양에 왔다 갔다 하는 교통비와 체류비 등을 모두 따지면, 집안 기둥이 우습게 뽑혔다. 정조 때의 무신 노상추(盧尙樞)는 10년간 과거 공부하며 500냥을 썼다고 하는데, 당시 웬만한 가족의 10년 치 생활비를 훌쩍 뛰어넘는 돈이었다(109~110쪽). 한마디로 과거 공부의 끝은 파산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백년지대계’의 붕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를 중심으로 짜인 조선의 교육 체계가 조금씩 허물어졌다는 것. 그 시작은 부정행위와 입시 비리였다. ‘난장(판)’이란 단어를 흔히 쓰는데, 원래 뜻이 ‘소란스러운 과거 시험장’이다. 붓글씨 쓰는 소리만 들렸을 법한 시험장이 실은 소란스러웠다니! 그 배경에는 뻔뻔하고 과감하게 저질러진 온갖 부정행위가 있었다(149~151쪽). 일단 과거는 ‘팀 프로젝트’에 가까웠다. 입시생뿐 아니라, 글을 짓는 거벽(巨擘), 예쁜 글씨체로 답안지를 작성하는 사수(寫手), 기타 잡일을 담당하는 노유(奴儒)와 선접(先接), 이 모두를 가려줄 거대한 우산을 챙기는 수종(隨從)이 함께했다. 여기에 참고할 책을 품속에 넣어 숨기는 협서(挾書)까지 더해지면 ‘오픈 북 시험’이 따로 없었다. 시험관들은 이들을 봐도 못 본 척했다. 너무나 만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213~214쪽). 그러다 보니 부정행위의 규모가 점차 거대해졌다. 숙종 때는 성균관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40미터 길이의 대나무 관이 우연히 발견되기도 했다. 성균관에서 과거가 열리면 이 관을 통해 문제지와 답안지를 교환했던 것이다. 연루자가 매우 많았을 텐데, 또 다른 증거나 증인이 없어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224~225쪽).
하지만 이러한 부정행위들은 권력형 입시 비리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었다. 조선 중기를 넘어가며 당쟁이 치열해지자, 당파마다 세력을 불리기 위해 서슴없이 입시 비리를 저질렀다. 숙종 때는 시험장에서 남인 유력자의 아들을 찾는 시험관에게 서인 아무개가 자신이라며 손을 들어 급제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230~231쪽). 그 결과 당파 간에 고소, 고발이 남발되면, 결국 피를 부르는 ‘과옥(科獄)’으로 비화했다.
저자에 따르면,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입시 비리의 주동자들은 뻔뻔했다. 영조 때는 아예 대놓고 가문(당파)을 따져 급제시켜야 한다고 어전에 청했을 정도다(236~240쪽). 물론 이런 세태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한 사람들이 없진 않았다. 순조 때의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은 나라의 인재를 뽑는 과거가 나라를 망친다며 울부짖었다. 그가 가장 우려한 것은 과거의 공정성 상실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입시 비리라는 적폐를 청산해야 할 지도층 인사들이 오히려 ‘그들만의 리그’를 수호하는 상황에서 공정성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런 시험에 어떤 인재가 관심을 두고, 또 평생을 바쳐 공부에 매진하겠는가? 개인의 노력과 성취로만 평가받는다는 믿음이 깨진 시점부터 조선의 백년지대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백만 있는 이들이 과거에 난입해 급제했으니, 관직을 수행할 능력을 갖췄을 리 없었다(240~241쪽).
그렇다면 조선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안타깝게도 해결하지 못했다. 고종마저 그 해결 방안을 놓고 고민했을 정도로, 권력형 입시 비리는 뿌리 깊고 오랜 문제였다(242쪽).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언제나 높았으나, 사리사욕과 각자도생의 현실 앞에 공허한 울림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결국 조선은 망했다. 이 망국의 과정이 500년 전과 그리 다르지 않은 입시 전쟁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생각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