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행,
능선과 골짜기에 서린 역사와 문화를 말하다
인문산행은 산에 오르며 그 속에 숨겨진 역사를 인문학의 관점에서 발굴하고, 규명하고, 해석하고, 향유하는 행위다. 한국의 산에는 산등성이와 골짜기마다 역사가 서려 있다. 우리 선조들은 산을 사랑하여 그에 대한 글과 그림, 시를 무수히 남겼다. 한국산서회의 인문산행팀은 꾸준히 산을 답사하며 숨겨진 역사와 문화유산, 남겨진 지명의 유래, 진경산수화에 그려진 산길 등을 찾고 고증하여 우리가 놓치고 잃어버린 산악문화유산을 조명하고 연구해왔다. 이 책은 그 인문산행의 기록을 담은 것이다.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은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숨어 있는 산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무학대사는 북한산을 훑으며 새 도읍지를 찾았고, 세조는 보현봉에 올라 서울을 넘보며 왕위 찬탈의 기회를 노렸다. 김시습은 수락산에 10여 년을 머무르며 동봉을 호로 삼고 시를 읊었으며, 겸재 정선은 우리의 산을 화폭에 담았고, 추사 김정희는 산을 오르며 금석학을 연구하고 바위글씨를 남겼다. 무심코 오른 산등성이와 더위를 피해 물놀이를 즐긴 계곡에는 이처럼 잊히거나 모르고 지나치던 우리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숨어 있다. 이 책은 인문학의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단순히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과 함께 산을 오르다 보면 몇 번이고 올랐던 북한산, 수락산, 도봉산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산을 오르고 즐기는 산행을 넘어, 새로운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철저한 고증과 끈질긴 답사로
역사의 현장을 찾아내다
저자와 한국사서회 인문산행팀은 철저한 답사와 고증으로 인문산행의 품격을 높였다. 답사지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논문과 단행본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양의 자료를 훑어보고, 의문이 풀릴 때까지 몇 번이고 현장을 답사하며 고증을 해나갔다. 이런 작업으로 그동안 묻혀 있었던 여러 장소의 인문학적 위상을 높이고 많은 문화유산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한장석의 〈수락산 유람기〉에 등장하는 ‘문암폭포’가 어디인지 찾아내고 폭포 뒤편의 계곡 이름이 ‘은선동’임을 알아냈으며, 겸재 정선의 손자 손암 정황의 진경산수화 〈양주송추〉를 재해석하여 겸재 정선의 묘소 터를 비정했고, 수락산에서 우암 송시열의 바위글씨를 찾아내기도 했다. 구천은폭 인근에 인평대군의 별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물증인 ‘송계별업’ 바위글씨를 찾아낸 것도 인문산행팀의 공로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등산과 인문학이 결합하는 연결고리가 학문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라고 믿기 때문이다. 새롭게 발견해낸 역사적 사실과 유산은 그들의 고증과 답사 그리고 해석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를 방증한다. 이런 노력이 겹겹이 쌓여 인문산행을 더 깊이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인문산행은 그 이름처럼 산의 높낮이나 유명세와 관계없이 오로지 인문학의 관점에서 산을 바라본다. 궁산은 해발 74미터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지만, 군사적 요충지이며 겸재 정선이 현령으로 지내며 다양한 그림을 남긴 곳이다. 산 근처의 허가바위는 양천 허씨의 시조인 허선문이 태어났고, 허준이 《동의보감》을 저술한 곳이라고도 한다. 호암산은 비보풍수(풍수적 결함을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것)를 살펴보기 좋은 곳이다. 호암산은 한양도성을 넘보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있다. 태조 이성계의 꿈에 호랑이가 등장하여 경복궁을 때려 부수었다고도 한다. 이 무서운 기운을 막기 위해 선조들은 산 아래의 절을 중턱으로 끌어올려 비보 사찰을 지었다. 호암산 호압사에 얽힌 이야기다. 산행에 인문학의 개념이 더해진 것만으로도 산은 더욱 높고 깊어져 우리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산을 오르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더 즐겁게, 더 깊이 있게 산을 오르다
‘1부 서울경기 인문산행’은 ‘인왕산과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 ‘수락산의 폭포들을 찾아서’ ‘청계산의 추사박물관과 과지초당을 찾아서’ 등 매번 하나의 주제를 정하여 산행을 안내한다. 인왕산에서 나고 자란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의 장소를 답사하고 비정하여 인왕산을 오르며 필운대와 세심대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수락산을 오를 때는 김시습과 그를 흠모하여 수락산에 사당을 지은 박세당의 한시를 감상한다. 북한산을 걸을 때는 선조들이 그 안에 만들어놓았던 하나의 나라인 북한산성의 모습과 의미를 되새기고, 춘천의 청평산에 올라서는 고려시대의 정원의 모습을 상상해보게 한다.
‘2부 유북한산기’에서는 선조들이 남긴 유산기의 형식으로 절기별로 북한산의 아름다운 코스를 소개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산속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세조가 올랐던 보현봉을 오르는 기분, 비봉 위 비석의 가치를 밝혀낸 추사 김정희의 집념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문화유산은 궁이나 박물관에만 있는 것은 아니며, 역사는 책 속에만 있지 않다. 인문산행은 오래된 경구인 ‘유산여독서(遊山如讀書)’, 산을 오르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는 말을 이어받는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은 독서의 성과를 산 위의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고자 한다. 산을 오르며 역사를 배우고, 산을 오르며 지난 시간을 사색하는 것, 인문산행은 몸의 공부이자 마음의 운동이다. 《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과 함께라면 평범했던 산이 새롭게 다가오고, 산행은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