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이 ‘오래전, 거기’의 삶과 죽음을 상상하다!
가슴에 품은 유명인들의 묘지를 거닐며 그들과 나눈 침묵의 대화
지난해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3〉에서 김영하 작가가 “세계 도시에 가면 묘지들을 꼭 가본다”며 ‘묘지 투어’라는 독특한 여행법을 제시해 한동안 신선한 이슈로 떠오른 적이 있다. 저자는 이 프로그램이 방송되기 훨씬 전, 이미 ‘묘지 여행’에 푹 빠져 있었다. 20여 년 전부터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유명인들의 묘지를 즐겨 찾았고, 몇 년 전부터는 아예 목적의식적으로 묘지를 찾아다니며 사색과 공부를 위한 여행을 해왔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여행의 결실이다. 숱한 묘지 여행 경험을 추리고 추려,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과 중국 등 유럽 외 국가 13개국 31곳의 묘지에서 60여 명 망자들과 만난 이야기를 이 한 권에 담았다.
저자가 묘지에서 만나고 온 인물들의 면면 또한 화려하다. 셰익스피어, 헤르만 헤세,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괴테, 오스카 와일드, 카프카, 스탕달, 수전 손택 등 작가들과 헤겔, 마르크스, 쇼펜하우어, 니체, 벤야민 등 철학자들, 볼테르, 루소, 마키아벨리 등 사상가들, 바흐와 베토벤부터 짐 모리슨과 에디트 피아프까지 음악 안에서 살아간 인물들, 고흐, 샤갈, 미켈란젤로 등 화가들과 만 레이, 앙리 브레송 같은 사진작가들 그리고 레닌, 마오쩌둥, 호찌민, 체 게바라 등 혁명 영웅들까지,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기만도 벅차다.
그런데 저자는 이들을 ‘위인’이 아닌 ‘유명인’이라 칭한다. “낡은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만큼 혁명적인 생각과 위대한 행동을 한 사람일지라도 시대의 한계를 지속적으로 넘어설 수는 없으며, 생물학적으로는 결국 한없이 부족한 인간일 따름”이라며, “그들 역시 시대의 한계 속에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들이었음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들을 만나기가 편해”지기 때문이라 한다.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저자가 ‘오래전, 거기’ 살았던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되짚고 상상하며 그들과 침묵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 되고 어려운 일이었을지, 조금은 짐작하고 이해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에 담긴 인물들 이름의 무게감만큼이나 그들을 대하는 저자의 마음속 깊이감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비록 묘지 앞에서 나눈 말 없는 대화였을지라도, 그것이 가벼운 메아리로 흩어지지 않고 묵직한 여운으로 남아 그 인물들을 한 번 더 되돌아보게 만드는 걸 보면 말이다.
“묘지는 책이요, 갤러리이며, 학교다”
묘지에 대한 남다른 시선으로 빚어낸 풍성하고 깊이 있는 이야깃거리
‘묘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주목하면 이 책은 더욱 무게감을 갖는다. 저자에게 묘지는 책이요, 갤러리이며, 학교다.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묘비명이나 묘지 주변 조형물이 하나의 텍스트이고, 묘지에 깃든 어떤 분위기가 또 하나의 텍스트이며, 거기 잠든 사람이 제게 부려놓은 지식과 감정이 한데 어울려 단단한 텍스트를 가진 한 권의 책으로 묘지가 읽혔습니다.” 그래서 ‘묘지는 책’이란다. “묘지 조각품들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압축적인 생각과 깊은 통찰이 깃들기 마련입니다. 꼭 누군가의 묘지를 참배한다는 생각 없이 그저 묘지 사이로 난 오솔길을 천천히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몽상과 사색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묘지는 갤러리’란다. “책과 예술품이 탄생한 곳으로의 여행을 통해 어렵기만 하던 것들을 수월히 읽게 되고, 인류가 걸어온 길과 개인의 삶 그리고 죽음을 통찰하는 것만큼 훌륭한 공부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모든 여행이 공부이고 모든 여행지가 학교지만, 묘지들 역시 매우 특별한 것들을 가르쳐주는 학교이자 교실입니다.” 그래서 ‘묘지는 학교’란다.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진다. 저자가 왜 그토록 오랜 시간에 걸쳐, 그토록 여러 곳을 누비며 묘지를 찾아다녔는지 알 것 같다.
묘지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한 저자는 ‘묘지’라는 공간에 대한 정의도 남다르다. ‘언젠가 이 지구별에서 활보하고 다니던 자들이 지친 몸을 누인 기록과 기억과 성찰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에서 저자는 유독 수다스럽다. 이젠 세상에 없는 어떤 인물을 생각하며 그의 묘지 앞에 서야겠다 마음먹는 순간부터 묘지를 찾아가는 여정에서의 여러 생각과 인물에 관한 정보 그리고 그곳에 당도했을 때 느낀 소회까지, 저자가 품은 이야깃거리가 그만큼 풍성하다는 뜻이다. 묘지에 대해 스스로 내린 정의처럼 기록과 기억과 성찰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는 뜻이다. 글로 다 풀어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직접 찍은 사진들이 채운다. ‘묘지’라는 장소의 특성 때문에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는 풍경 가운데서도 밝음과 희망을 찾아 담으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마치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음을 사진으로 드러내 보이듯 말이다. 그렇게 저자를 따라 길을 나서고 인물의 발자취를 더듬다 보면 어느새 저자의 감흥에 동화되고 만다. 그 인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물론, 나 또한 그들이 잠든 묘지로 찾아가 영혼으로라도 그들을 만나고 싶어진다.
“나만의 관점과 관심사를 따라 떠나는 여행을 권하다”
새로운 테마의 여행, 묘지인문학 여행 에세이
수많은 여행 경험을 가진 여행작가답게, 저자는 그렇고 그런 비슷비슷한 콘셉트의 오늘날 여행 분위기를 안타까워한다. 남들이 갔던 곳에 가서 똑같은 풍경을 보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또 그걸 똑같은 인증샷으로 남기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되묻는다. 그러면서 나만의 관점과 관심사를 따라 떠나는 여행, 이를테면 ‘묘지 기행’ 같은 새로운 테마의 여행을 대안으로 권한다. 이 제안은 그야말로 솔깃하다. 그런 여행의 의미와 보람을 이 책 전체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은 흔하디흔한 단순 여행 에세이가 아니다. ‘묘지’를 매개로 그곳에 잠든 인물들의 삶과 죽음,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것들까지 되짚어보는 ‘인문학 여행 에세이’다.
왜 여행 중 묘지를 찾느냐는 질문에 김영하 작가는 “일단 조용하고, 고요하다. 잘나가는 관광도시들은 여행하다 보면 시끄러워서 지치는데, 묘지에서는 휴식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저자 이희인은 “꽤 오래전부터 묘지 앞에 서면 알지 못할 전율을 느끼곤 했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이 말들의 뜻을 체감하며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비행기 티켓을 검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